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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호구씨의 결코 웃지 못할 연말정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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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형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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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21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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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장의 世上萬事] '13월의 세금폭탄'을 받아들이는 직장인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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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47살이 된 직장인 호구씨는 엊그제 연말정산을 하기 위해 국세청 홈페이지에 접속한 뒤 한동안 깊은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그것은 자신이 걸어온 인생 전반을 뒤돌아보는 참담하고도 통렬한 회한의 시간이었다.

내가 잘못 살아온 것일까. 돌이켜보면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조금 전 로그인하느라 20여분을 허비했음에도 국세청을 욕하거나 탓하지도 않았는데. 국가가 부여한 4대 의무, 국방과 교육, 납세와 선거의 의무도 꼬박꼬박 지켰는데. 출산 장려 시책에 맞춰 아이들도 3명이나 낳고 키워왔는데. 영화 '국제시장'의 아버지 만큼은 아니었더라도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저 남들처럼 성실하게, 평범하게 살아왔는데….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애초부터 가진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던 게 원죄였을까. 학창 시절 각종 알바를 해 가며 겨우 학자금을 마련해 대학을 졸업한 뒤 고만고만한 회사에 취직해 일한 지 21년째. 우리네 평균적 월급쟁이의 삶이 그러하듯 호구씨는 재테크에는 젬병이었다. 정보가 없으면 눈치라도 있든가. 주변에서 땅을 사네, 집을 파네, 선물거래가 어쩌구, 파생상품이 저쩌구해도 호구씨는 엄두도 못 냈다. 그것도 뭐 총알이 있어야 하는 게지, 하루 먹고 살기도 바쁜 내가 무슨. 30대 중반 한푼 두푼 모아놓았던 돈 그나마 주식으로 다 날린 이후 그는 대박의 꿈 따위는 접었다. 난 일생에 돈복이 없는 게야.

그런데 호구씨는 이 나이 먹도록 돈복만 없는 게 아니라 집도 없다. 아직도 셋방살이인데 2년 전 집주인의 집요한 ‘설득’에 못 이겨 반전세집을 경험중이다. 월세를 내는 게 마음이 아프지만 집 샀던 친구들이 대출금 갚느라 삼겹살도 맘 놓고 못 먹는다며 푸념하는 걸 보며 위안을 삼는다.

월급을 허투루 쓴 기억도 없는데 난 왜 집도 없는 걸까. 연말정산 홈페이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호구씨는 살아온 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까운 나이에 집 한칸 없다는 사실을 새삼 뼈저리게 깨달았다. 월급을 쪼개 부모님께 매달 용돈도 보내드리고, 처자식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이것저것 요금도 내고 하다 보니 남는 게 없던 생활이었다. 노후 연금은 남의 얘기다. 그나마 다행히 빚이 없어서 남들보다 사정은 낫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발전된 삶의 질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상의 반복이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아,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정신 차려. 한참을 신세타령에 빠져 있던 호구씨는 현실로 돌아와 떨리는 손으로 연말정산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기분이 이런 것인가. 이럴 줄 알고 지난 1년간 나름 노력했는데 과연…. 그러나 빈 칸마다 숫자를 기입하는 동안 뭔가 더 노력했어야 한다는 자괴감은 커져가기 시작했다.

아, 월세 공제 좀 받으려 했더니 소득 기준이 조금 넘네…. 얼마 안 넘어가는데 그냥 모른 척 써볼까. 집주인에게는 뭐라고 말하나. 주택청약저축인가 뭔가 이것도 그 놈의 소득기준 때문에 가입을 못했는데. 어라? 청약부금은 아예 공제를 못 받는 거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야? 신용카드보다는 직불카드가 공제액이 높다고 해서 작년에 더 많이 썼는데 효과가 있을까.

아, 현금영수증이 있었지. 근데 1년 동안 현금 쓴 게 이거밖에 안되나. 아, 전통시장 이용했어야 했구나. 우리 동네엔 마트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라고. 자가용 타면 40분 걸리는 거리를 버스 타고 매일 1시간 10분씩 다녔다. 대중교통 이용한 보람이 있을라나. 월세 내느라 13년간 냈던 종신보험 작년 초에 해약했는데 그게 악영향이 있겠지. 빠진 건 없나. 큰 아들 녀석 학원비에 막내 병원비까지 있는 거 없는 거 다 써 넣었다.

드디어 버튼을 클릭.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작년 연말정산에서는 30만원을 환급받았는데, 올해는 70만원을 더 내라니? 월급이 오른 것도 아닌데? 무려 100만원 차이라고?

호구씨는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또 돌린다. 숫자들을 보고, 또 본다. 다른 사이트의 연말정산 계산기들을 찾아 또 넣어 본다. 결과는 같다. 털썩. 잠시 화가 치미는 바람에 국세청 홈페이지가 요구한 만족도 설문에서 '매우 불만'을 누르고 나왔다.

호구씨는 100만원이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것들, 예를 들면 지난 크리스마스 때부터 막내가 사달라고 조르는 변신 로봇과 고생하는 아내를 위한 온천 여행 등을 잠시 생각했다.

아니다. 다 부질없다. 호구씨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 생각이 간절하지만 끊은 지 19일째다. 이 모든 게 다 내 잘못이다. 난 더 아꼈어야 했다. 난 너무 안일했다. 담배도 진작에 끊었어야 했다. 그 순간 지난해 주차위반과 과속을 하다 적발된 사실이 주마등처럼 머리속을 지나갔다. 아내 몰래 딱지값으로 무려 15만원을 냈다. 나중에 들켰지만서도.

아, 이 어리석은 놈. 얼마나 바쁘다고 그런 말도 안되는 위반을 하다니. 난 좀 더 착하게 살았어야 했다. 이제 자가용은 타지 않으리라. 기름값이 리터당 500원으로 떨어진다 해도 타지 않으리라.

횡재를 바라보며 로또 사는 일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제는 로또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다. 외식도 줄이고, 술도 끊고 신문도 끊으리라. 모조리 다 끊겠다. 허리띠를 더 졸라 매겠다. 아, 그런데 기부가 마음에 걸린다. 호구씨는 수년 전부터 아동복지단체 2곳에 매달 1만원씩 기부해 왔다. 며칠 고민 좀 해봐야겠다.

호구씨는 평소 세금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재산세니, 증여세니, 상속세니 내고 싶어도 못 내는 세금들이었다. 그런데 연말정산을 마치며 이제부터라도 세금과 친해져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나마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처럼 연말정산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니까. 그리고 이 세상에는 아직도 끼니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넘쳐 나니까.

호구씨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퇴근길을 나섰다. 애들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살아야지. 그런데 올해 사장님은 연봉을 좀 올려주실까. 혹시 깎는 건 아닐까. 갑자기 지난해 권고사직당한 옆 부서 부장이 생각난다. 어? 설마 나가라고 하는 건…. 호구씨는 다시 깊은 상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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