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고과장'의 주3일 제주살이…"그때만큼은 아빠로"

/사진=홍봉진기자 [email protected]

'길이란 걷는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나아가기 못하는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은 모두에게 열렸지만, 모두가 그 길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미생'중에서)

케이블TV tvN 드라마 '미생'의 주제어처럼, '걷는 것'이 아닌, '나아가는 것'이 길이라면, 배우 류태호(51)는 길 위에 서 있는 것이 분명했다. 모두에게 열렸지만 가질 수 없었던 길을 그는 '나아가는' 선택을 통해 개척하고 있었기 때문.


연기의 주 활동 무대인 서울을 쉽게 벗어날 수 있는 연기자들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류태호는 지난해 12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활동을 위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도시에 올라오더라도 집은 자연과 떨어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제주도로 내려간 것이다.

"4년 전부터 이주를 결심했어요. 서울에선 아이들이 집에서 소리를 낼 수도 없고 마음껏 뛰어놀 공간도 부족하잖아요. 다양한 종류의 교육도 가능한 곳이 제주도였어요. 대학 연기과 교수를 12년간 하다가, 2년 전에 그만뒀는데 그때 미뤘던 꿈을 실천에 옮긴 셈이었죠."

그가 지난해 12월 이주한 곳은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에 있는 가수 장필순의 옆집. 20대 이후 연극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장필순은 그를 처음에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KBS제주 프로그램 '보물섬'에 출연한 류태호를 알아보면서 그들은 다정한 동네이웃이 됐다. 동갑내기 두 사람은 이내 저녁에 가벼운 맥주 한잔 걸치며 말을 트는 친구로 발전했다.


"우리 가족이 내려온 건 귀농도 귀촌도 아니에요. 굳이 설명하자면 피도(避都)라고 해야겠죠. 답답한 도시를 피해 온 거예요. 사실 제주도로 내려오면 게스트하우스 아니면 카페 차리는 거 외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그러니 일을 위해서라기보다 힘든 도시의 삶을 벗어나고 싶다는 갈망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어요."

현재 류태호는 TV드라마 '미생'에서 가장 현실감있는 직장 상사 고 과장 역으로 출연중이다. 극에서는 부하의 실수를 나무라면서도 실적에 대해선 큰 소리로 칭찬하는 우리 회사 주변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상사다.

극의 역할만 보면 제주도는커녕, 여행 한번 가기 어려운 가장일 것 같은데, 그는 현실에선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었다. 류태호는 "일주일에 4번은 현실주의 직장 상사로, 나머지 3일은 이상주의 아빠로 생활하고 있다"고 웃었다.

30년 이상 연극 무대에 몸담아온 그는 1996년 영화 '살인의 추억'의 원작인 연극 '날 보러 와요'에서 1인 4역을 맡아 그해 연기상을 모두 휩쓸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선 두 번째 용의자 조병순 역을 맡았고, 지난해 개봉한 영화 '집으로 가는 길'에선 얄미운 밉상 연기로 주목을 끌었다.

그가 제주도로 이주 결심을 한 배경에는 저가 항공의 운임료와 자연이라는 솔깃한 유혹이 우선 컸다. 그러다 제주도에 살면서 문화의 다지역화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도 모색하게 됐다.

"옛날에는 연극한다고 하면 다들 대학로에 몰려들었어요. 하지만 지금 대학로에 연극이 있나요? 오히려 연극이 다른 지역으로 흩어지면서 다지역화 되지 않았나요? 이제 연극은 도심의 한 복판에서 꾸려지는 독점의 예술이 아니라, 각 지역에서 언제든 보고 감상할 수 있는 보편적 문화로 범위를 넓혀야한다고 생각해요."

연극 등 연기자 관련 학과는 현재 전국 80여곳에 이른다. 하지만 활동 무대는 서울에 90%이상 집중돼 있다. 류태호는 "미국이나 영국의 수도가 문화의 거리가 아닌 것처럼, 서울 중심의 문화 집중 정책도 분산돼야한다"며 "나부터 제주 지역 문화를 활성화하기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해볼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만 1년 된 제주살이 신참내기인 그는 제주도에 몰려드는 대중문화예술인의 발걸음을 반기면서도 외부 공연의 뜨내기 시장화에 대한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제주문화 활성화한다는 취지로 외부 공연을 자꾸 가져와 일회성으로 끝내고 돌아가는 문화행사는 지양했으면 해요. 하드웨어를 키울 게 아니라, 사람을 키워야하는데 그런 면이 많이 부족한 편이죠. 그러려면 학교를 세우고, 공연예술쪽 인재를 키우는데 집중해야 하잖아요. 아직은 일회성 외부 공연이 제주문화의 대부분을 채워서 많이 아쉬워요."

1주일에 3일, 푸른 바다를 보고 그 기운으로 '미생' 촬영에 응한다는 그는 "자연은 보면 볼수록 너무 매력적인 것 같다"며 "제주도는 길만 뚫고 아무것도 안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