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살에 시력잃고…점자배워 새인생 찾았어요"

12일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실로암 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일하고 있는 점자교정사 김한씨(31)를 만났다. 김씨는 지난해 전국 장애인기능경기대회 점자교정 분야에서 1등을 수상했다. /사진=최동수 기자

2006년 7월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하루 앞두고 세상이 흐려졌다. 안경을 벗고 눈을 비벼봤지만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옜다. 찬물을 얼굴에 끼얹어 봐도 소용이 없었다. 시력이 점점 떨어지다 실명에 이르는 진행성 희귀질환, '망막색소변성증'(RP)이었다.

점자책 문법과 표현을 검수하는 '점역·교정' 분야 국내 1인자인 김한씨(31·실로암 시각장애인복지관 점역·교정사)는 시한부 실명 판정을 받은 13년 전 여름을 잊을 수 없다.


김씨는 "기말고사를 포기하고 병원을 갔더니 의사가 장애 3등급 판정을 내리며 '결국 실명한다'고 했다"며 "당시는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장애판정을 받은 김씨가 점자 공부를 시작하기까지는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일상생활이 힘들어질 정도로 시야는 좁아졌지만 대학생 때까지 책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시력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씨는 "대학생 때까지 스스로 시각장애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며 "중어중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고 2012년 중국 교환학생을 떠난 것도 글을 읽을 수 있는 시력이 남아 있을 것이란 희망이 있어서였다"고 말했다.


김씨의 꿈은 중국 생활 6개월 만에 산산조각이 났다. 시험을 보던 중 갑자기 시험지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것. 시험지에 얼굴을 맞대고 뚫어져라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글을 읽을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고사장을 나온 김씨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국으로 돌아온 김씨는 2014년 대학 졸업 후 취업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전공인 중국어를 살리고 싶었지만 김씨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글을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컸다. 김씨는 결국 무기력증에 빠졌다.

2년 동안 방황한 김씨는 2016년 8월 우연히 방문한 서울 관악구 봉천동 실로암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김씨는 "남정한 자립생활지원센터 소장에게 상담을 받는데 '나도 시각장애인이야'라는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흘렀다"며 "스스로 장애를 받아들이지 않아 시각장애인을 만나지 않고 살았었는데 같은 처지인 사람과 만나니 마음속 응어리가 풀린 것 같았다"고 떠올렸다. 김씨는 남 소장에게 '점역·교정사'라는 직업을 추천받고 새로운 목표도 가지게 됐다.

점자 공부를 시작한 김씨는 2017년 전국 장애인기능대회 점역·교정 부문에서 4등을 차지하고, 지난해 1등을 수상했다. 현재 김씨는 1년에 30권 정도 점자책을 교정하고 있다. 김씨가 교정을 보는 책은 대학교 전공서적, 중국어 문법책 등 전문 서적이다. 최근에는 점자 교정사 직업훈련 강사로 일주일에 3번 시각장애인을 만난다.

김씨의 꿈은 시각장애인에게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김씨는 "부모님과 동생, 주변 지인들이 항상 저를 지지해주고 응원해줘서 무너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며 "뒤늦게 장애를 가지고 무기력증에 빠진 많은 시각장애인이 점역·교정사로 자기 몫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함께 소통하며 희망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