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가입 해준다는데…설계사가 고용보험 안반기는 이유

정부가 이른바 ‘전국민 고용보험 가입’를 추진하면서 40만명이 넘는 보험설계사가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보험회사뿐 아니라 당사자인 보험설계사조차 고용보험 의무가입을 반기지 않는다. 이유가 뭘까.

고용보험 의무화, 10만 설계사 일자리 잃을 판


고용노동부는 이달 중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이하 특고) 종사자의 고용보험 적용을 위해 마련한 고용보험법과 보험료징수법 일부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법안이 통과하면 보험설계사는 고용보험 의무화 우선 적용 대상이 된다. 정부는 현재 특고 종사가 최대 약 22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중 약 5분이 1가량이 보험설계사다.

1995년 도입된 고용보험은 실직 시 실업급여를 받는 것이 핵심이다. 임금노동자를 중심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특고를 비롯해 프리랜서나 자영업자 등은 혜택을 받을 수 없다. 특고는 근로자처럼 일하지만 사실상 개인사업자로 등록돼 근로계약이 아닌 용역·도급·위탁·위임계약 등을 체결한다. 예를 들어 보험설계사는 특정 회사나 GA(보험대리점)과 위탁계약을 맺고 상품을 판매하지만 출퇴근 등 근태에 구속받지 않고 자영업자처럼 일한다. 말 그대로 특수한 형태의 근로자다.

보험업계는 보험설계사에 대한 고용보험 가입으로 인한 추가 부담이 연간 약 436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 여기다 건강보험, 국민연금 등 4대 사회보험에 모두 가입할 경우 연간 부담액은 1조3000억원대로 치솟는다. 이는 전체 보험사업비의 11~14%, 총 보험수수료의 24~29%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막대한 비용 부담은 결국 설계사에 대한 대규모 계약해지 사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업계에서는 전체 보험설계사 약 42만명 중 월소득이 100만원이 채 안되는 설계사 약 15만7000명이 구조조정 대상이 될 것으로 파악한다. 고용보험으로만 한정하더라도 설계사 9만6000명의 일자리가 줄어들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가정주부와 고령자 등 월소득이 낮은 저능률 설계사는 비용만 커지기 때문에 보험사가 계약을 유지할 유인이 없어지게 된다. 지난해 말 기준 생명보험설계사 중 여성 비중은 78.7%였고 50세 이상자는 48.5%를 차지했다.

보험업계 한 관계자는 “설계사는 근무여건이 유연하고 정년이 없어 가정주부나 경력단절녀 등 여성과 고령자의 비중이 높았는데 고용보험 가입이 의무화되면 대규모 구조조정이 불가피할 것”이라며 “특히 비용 부담을 버티기 어려운 중소형 GA는 존폐 위기에 놓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혜택받기 어려운데 보험료 부담“ 설계사의 속사정
문제는 보험설계사도 고용보험 가입 의무화를 반기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정부가 처음으로 특고 종사자에 대한 고용보험 가입 의무화를 꺼낸 2017년 보험연구원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설계사들의 고용보험 의무가입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38%가 ‘반대한다’고 답했다. 45.5%는 ‘본인 부담이 늘어나므로 선택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답했다. 고용보험 가입의무화에 찬성하는 비율은 16.5%에 그쳤다.

이는 보험설계사들이 직업 특성상 고용보험에 가입하더라도 혜택을 받기 어렵다는 점과 본인이 보험료의 절반을 부담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같은 설문에서 고용보험이 제공하는 실업급여는 비자발적 실업 시에만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설계사는 84.9%였다. 또 가입당사자가 보험료의 일부를 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답한 설계사의 비율도 60.2%였다.

정원석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보험설계사를 그만두는 경우 중 98% 이상이 자발적 퇴직이므로 회사의 일방적인 해촉 시에만 실업급여를 제공하는 고용보험 가입은 설계사에게 부담만 지우고 혜택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라며 “결국 본인들의 직무특성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설계사들이 인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고용노동부가 2013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설계사의 89.8%가 이직사유를 ‘자발적인 이직’이라고 답했다. 구조적으로도 현행 보험업법에서 보험사의 계약해지 요건을 엄격히 제한하고, 설계사의 계약해지 요청을 거부할 수 없도록 규정해 비자발적 이직이 생기기 어렵다.

보험업계 한 관계자는 “일반적인 기업은 근로조건 악화나 임금체불, 불합리한 차별대우, 경영악화 등 사업주 책임에 따라 비자발적으로 이직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회사가 보험료를 일부 부담하는 것이 합리적이지만 설계사는 대부분 본인의 사정이나 판단으로 회사를 옮기기 때문에 회사가 의무적으로 보험료를 내주는 것은 과도하다”고 말했다.

고용보험 가입 의무화로 보험설계사에게 근로자성이 부여되면 앞으로는 자영업자와 같은 근태를 이어가기 쉽지 않다. 지금은 보험설계사들이 특별한 근태관리 없이 일하지만 출퇴근이 의무화되는 등 활동관리가 이뤄질 수 밖에 없다.

또 전속 설계사의 교차판매도 금지될 수 있다. 교차판매는 생보사 소속 설계사가 한 손보사의 상품을, 손보사 소속 설계사가 한 생보사의 상품을 함께 팔도록 허용하는 제도다. 보험설계사의 소득 보전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다. 고용보험이 의무화하면 제도 자체를 재검토 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근로자는 겸업이 금지돼 있고 특히 업무시간에는 부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차판매는 다른 보험업권의 상품을 파는 것이기 때문에 겸업에 해당한다.
”정부 ”일단 시행“vs 업계 ”제도적 보완 없이 안돼“
정부와 보험업계는 최근에도 고용보험 문제를 놓고 간담회를 가졌지만 양측의 입장 차만 재확인했다. 고용노동부는 코로나19(COVID-19) 장기화로 특고 종사자들의 경제적 어려움이 커짐에 따라 고용보험 의무가입 필요성이 더 커졌다는 입장이다. 코로나19로 인한 긴급고용안정지원금 신청 결과 신청자 180만명 중 60만명 이상이 특고 종사자일 정도로 보호가 시급하다는 것이다.

보험업계는 설계사의 직종 특성은 근로자가 아닌 자영업자에 해당한다고 본다. 소득세법상에서도 사업소득자로 분류돼 과세하고, 대법원 역시 설계사를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라고 판시했다. 이에 따라 설계사에 대한 고용보험 가입 의무화가 시행되더라도 현행 자영업자 고용보험을 준용해 당사자 의사에 따라 적용제외를 신청할 수 있는 절차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도적인 구멍을 메우지 않은 채 ‘일단 도입하고 보자는 식’은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소득 감소를 이유로 이직해도 실업급여를 지급하도록 함에 따라 고용보험을 악용하는 사례가 벌어질 것이란 우려도 크다. 설계사는 본인 의도에 따라 소득수준을 조절할 수 있다 보니 일부러 소득을 줄인 뒤 실업급여를 받고 다른 보험사나 GA로 옮겨 다니는 이른바 ‘철새설계사’를 양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험업계 다른 관계자는 “성실한 장기근속자는 보험료만 부담하면서 혜택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잦은 이동으로 모집질서를 해치는 철새 설계사들이 실업급여를 받는 역차별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며 “이직 횟수 제한 등 수급요건에 보완장치가 필요하고, 시행령 개정 단계가 아닌 법률 개정 단계에서 고용보험이 적용되는 특고 종사자의 기준소득 산정방식 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