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등바등하지 않아 더 뜨거운, '뜨거운 씽어즈'

김영옥, 사진제공=JTBC

"바람이 되면 좋겠다."


85세 노배우 김영옥은 이렇게 말하며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불렀다. 지켜보던 참가자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이 영상을 찾아본 대중 역시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는 소감을 댓글로 전했다. 그가 대단한 가창력의 소유자여서가 아니다. 노래에 진심을 담아서다. "노래를 목으로 부르지 말고, 가슴으로 부르라." 김영옥은 이를 실천했다. JTBC 새 예능 ‘뜨거운 씽어즈’(연출 신영광)가 1회 방송 만으로 뜨거워질 수 있었던 이유다.



‘뜨거운 씽어즈’는 "오늘이 남은 날 중 제일 젊은 날"이라고 외치는 시니어들이 뜨거운 가슴으로 노래하는 합창단 도전기를 그린다. 김영옥의 절친한 후배이자 동생인 81세 나문희를 비롯해 김광규, 장현성, 이종혁, 윤유선, 권인하, 서이숙, 전현무 등 참가자들의 나이를 더하면 도합 990살이다.


그 기획의도를 되새겨 보자.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일까, 늙은 날일까? 두 가지 모두 해당된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보다 젊다. 반대로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하루만큼 늙었다. 결국 모든 것은 마음 먹기 나름이다. 어제와 초점을 맞춘다면 오늘의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나이 먹은 셈이고, 내일을 바라본다면 오늘의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어리다.


‘노래를 부른다’는 것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새로운 도전일 수도 있고, 막연한 시도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합창이다. 무대에 서서 독창을 하려면 가창력이 수반돼야 한다. 모든 것을 오롯이 나 혼자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합창단의 일원이 되면, 나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질 필요가 없다. 축구에 비유하자면 수비수가 공격까지 잘 할 이유가 있을까? 골키퍼가 골을 넣어야 할까? 같은 맥락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장점을 살리며 탄탄한 팀을 구축해가기 위해 한 조각의 퍼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면 성공이다. 이 과정이 곧 합창이라 할 수 있다.

나문희, 사진제공=JTBC

그 첫 단추로 김영옥과 나문희를 내세운 것은 제작진의 영리한 판단이었다. 김영옥은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선곡한 것에 대해 "내세에서도 바람이 되어 열심히 사는 건 부산하고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바람이 되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삶을 달관한 듯한 노배우의 말에, 이를 지켜보는 이들이 채 고개를 끄덕이기 전, 눈물이 먼저 대답했다. 그러면서 김영옥은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떠올리며 "사람이 ‘다’ 그렇다. 우여곡절이 있고 별의별 일이 많으니깐"이라고 덧붙였다. 이 한 마디로 김영옥은 나이의 장벽도 허물었다. 남녀노소를 떠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상을 살아오며 각자의 일을 겪으며, 자신만의 사연을 쌓아간다. 그러니 80대 김영옥이 아니라 20대의 삶도 그들 기준으로는 충분히 팍팍하다. 이 진심만 담을 수 있다면 어떤 노래여도, 대단한 가창력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울림을 줄 수 있다.


김영옥이 "꼬드겨서" 합창에 참여하게 됐다는 나문희 역시 그 어디서도 얘기하지 않았던 속내를 꺼냈다. 첫 순서로 무대에 올랐음에도 나문희는 담담했다. 하지만 "난생 처음 무대 위에서 노래를 선보인다"면서 "너무 행복하다"고 벅찬 마음을 표현하는 나문희의 모습은 10대 소녀의 설렘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이어 "내가 다시 태어나면 음악을 하려고 했다"면서 "배우가 안 되면 가수가 됐을 거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문희에게 가수는 못 다 이룬 꿈이었을까? 꼭 그렇진 않다. 그는 직업인으로서 부르는 노래가 아닌, 노래 그 자체에 집중했다. "노래는 내 분야가 아니니 항상 행복해 보인다,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면서 "할머니들도 집에만 있지 말고 나와서 노래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나문희에게 노래는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 위해 동행하고 싶은 존재였다. 그래서 그가 부른 ‘나의 옛날 이야기’ 역시 듣는 이들을 울렸다.

김문정(왼쪽)과 최정훈. 사진제공=JTBC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김문정 음악감독은 "음악성과 이야기가 공존할 때 어떤 감동을 주는지 다시 한 번 느끼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곰곰이 따져보면, 가창력과 가수의 인기는 비례하지 않는다. 노래 실력만으로 따지자면 일선 가수들을 뛰어넘는 보컬 트레이너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각자의 길은 달라진다. 아마도 가수의 길을 걷게 된 이들은, 기교가 아닌 마음으로 노래부르며 자신 만의 이야기를 음표 위에 놓는 솜씨가 더 뛰어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첫 단추를 잘 꿴 만큼 다음 행보에 대한 기대치는 상승했다. ‘뜨거운 씽어즈’의 본령은 예능 프로그램이다. 교양 프로그램이라면 감동과 공감만으로 충분할 수 있지만, 예능은 다르다. ‘재미’가 수반돼야 한다.


그 황금비율을 지켰던 프로그램이 있었다. 2011년 방송됐던 KBS 2TV ‘남자의 자격’의 청춘합창단이다. 이경규·김국진·이윤석·전현무·윤형빈 등 ‘남자의 자격’ 멤버들과 오디션을 통해 선발한 만 52세 이상의 비 연예인으로 구성된 합창단은 박칼린 음악감독의 지휘 아래 인생의 합창을 성공시켰다.


‘뜨거운 씽어즈’가 청춘합창단의 인기를 뛰어넘어 ‘섬싱 뉴’(something new)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과 준비가 필요할까? 이런 질문에 제작진은 ‘담백함’으로 답했다. 연출을 맡은 신영광 PD는 "어르신들이 기교 없이 담백하게 노래를 해도 인생이 묻어나오지 않나. 다들 거기서 감동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서바이벌과 경연이 난무하는 방송계에서 합창 프로그램을 해보면 어떨까 했다. 노래뿐만 아니라 인생도 합쳐지면 유쾌한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굳이 꾸미지 않겠다는 다짐, ‘뜨거운 씽어즈’가 더 뭉클하게 다가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