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장기 과제→2024년 이주...점점 산으로 가는 1기 신도시 재건축

1기 신도시인 경기도 고양시 일산 서구 아파트단지 일대. /사진제공=뉴스1

"최소 10년이 필요한 대규모 재건축 사업을 2년 만에 시작하겠다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것이다"

윤석열 당선인이 공약한 '1기 신도시 재정비' 사업이 6.1 지방선거를 앞두고 점점 산으로 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표심 확보를 위해 정치권에서 각종 '공수표'가 남발되는 가운데 새 정부 정책 밑그림을 그리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모양새다.
1기 신도시 재건축, 선거 국면 정치권 표심 경쟁에 인수위 '갈팡질팡'29일 부동산 업계와 인수위에 따르면 1기 신도시 재건축 정책과 관련해 인수위는 금주부터 수차례 입장을 바꿔 혼선을 야기했다.


지난 25일 인수위 측이 "1기 신도시 재건축 문제는 부동산TF가 중장기 국정과제로 검토 중인 사안"이라고 밝힌 것이 단초였다. '준공 30년 아파트 재건축 안전진단 면제' 공약을 폐기한다는 보도를 해명한 원론적인 답변인데 이를 두고 속도조절을 넘어 '공약후퇴'로 받아들이는 비판 여론이 생겼다.

다음날 심교언 인수위 부동산TF팀장은 이례적으로 기자브리핑을 자청해 "1기 신도시 재건축이 중장기 검토과제라는 표현에 오해가 있어 정정한다"며 "당선인 공약은 계획대로 진행 중이며 조속한 정비사업을 위해 노력 중"이라고 했지만 논란을 불식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안철수 인수위원장이 직접 나섰다. 그는 "인수위의 공식적인 입장은 1기 신도시 공약을 차질없이 추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야 합의로 특별법이 통과되면 새 정부 출범 즉시 사업을 진행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이를 전후로 인수위 안팎에선 1기 신도시 용적률 300% 일괄 상향 및 역세권 용적률 500% 추가 상향, 1기 신도시 TF 구성 등 정책 대안이 거론됐다. 분당은 2024년부터 이주를 시작할 것이란 관측도 제기됐다. 모두 '1기 신도시 특별법' 시행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처럼 중장기 과제가 사실상 내후년부터 시작하는 단기 과제로 변질된 것은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장밋빛 공약 남발도 문제지만, 인수위가 자초한 측면도 크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2월 국민의힘 대선 후보 시기 경기도 성남 분당구 야탑역 앞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스1

尹당선인, 당초 1기 신도시 재정비 '장기과제' 공약…특별법 추진, 속도전 강박감만 안겨사실 인수위 측이 처음 밝힌 '중장기 과제'라는 표현이 윤 당선인의 공약에 가장 부합한다. 윤 당선인은 현재 약 30만호가 분포된 분당, 일산, 평촌, 산본, 중동 등 5개 1기 신도시 지역에 '장기적'으로 10만호의 주택을 추가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인허가 절차 간소화, 안전진단 제도 규제 완화,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 완화, 금융지원, 토지용도 변경 및 용적률 상향, 세입자 이주대책 등을 규정한 특별법이 전제됐지만 시행 시기는 못박지 않았다. 또 한 지역에 동시다발적으로 재건축 추진이 집중될 경우 주변 지역 전월세난이 심화할 것을 우려해 3기 신도시와 중소형 공공택지에 이주 전용 단지를 마련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정책 구상 단계부터 임기 내에 입주 등 성과를 낼 가능성은 낮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1기 신도시 정책이 6.1 지방선거 표심을 가를 핵심 이슈가 되면서 이 같은 논리가 힘을 잃었다. 여야 모두 속도전을 강조한 정치 화법에 가려 사업 추진의 현실성을 담보하는 정책들이 무용지물이 됐다. 새 정부는 출범 후 2년 안에 1기 신도시에서 재건축 사업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강박감만 안게 됐다.

이 같은 행보가 일대 집값 불안을 가중시켰다는 지적도 있다. 부동산R114에 따르면 1기 신도시 아파트값 상승률은 올해 초부터 대선 전날인 3월 9일까지 0.07%였으나 대선 후 2개월간 0.26% 올라 상승폭이 3배 이상 높아졌다. 이 기간 경기(0.03%) 인천(-0.19%) 2기 신도시(-0.23%) 등 수도권 지역은 가격이 약보합세를 기록한 것과 대비된다.

윤석열 당선인의 1기 신도시 재정비 공약. /사진=국민의힘 대선 정책공약집

전문가들 "1기 신도시 재건축, 속도전보다 현실성에 초점 맞춰야" 조언전문가들은 1기 신도시 재정비 정책 방향은 대체로 동의한다. 이들 지역에 준공 30년 이상 된 노후 단지 비중이 점차 늘어나는 만큼 주거환경 정비와 양질의 신규 주택 확보를 위해 단계적인 재건축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인수위 측이 정치 논리에 휘말려 스스로 족쇄를 채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준석 제이에듀투자자문 대표(동국대 법무대학원 겸임교수) "비거주지인 그린벨트를 풀어 새롭게 조성하는 신도시는 정부 주도로 신속히 할 수 있지만 분당, 일산 등 이미 학군과 인프라가 구축된 1기 신도시 지역 재정비 사업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며 "특별법을 만들어도 동시에 지역 내 모든 단지를 재건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자녀 교육이나 직장 문제로 거주 중인 사람들은 재건축을 하더라도 3기 신도시로 거주지를 옮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당초 구상대로 재건축 안전진단과 초과이익환수제, 분양가상한제 등 현 정부가 만든 규제를 풀고 시장에 맡기면 될 일을 스스로 특별법이란 족쇄를 만들어 무리하게 추진하면 결국 정책 실패 책임론만 떠 안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진형 공동주택 포럼 대표(경인여대 교수)는 "인수위나 새 정부가 1기 신도시 재정비 사업은 필요하지만 제대로 하려면 중장기적으로 시간이 필요하다는 현실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며 "용적률을 높여도 건폐율은 낮춰 기존 주민들의 삶의 질을 도모하고 불가피하게 인구 수가 이전보다 많이 늘어나는 도시계획을 짜게 된다면 그에 걸맞는 교통 등 인프라 확충 계획도 병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또 "1기 신도시 재건축에 따라 기존 2기 신도시와 새로 조성할 3기 신도시가 슬럼화될 수 있는 문제점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밖에도 1기 신도시 재정비 공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존 구도심과의 역차별 문제도 풀어야 할 숙제다. 실제로 서울 시내 준공 40~50년차 노후 단지도 각종 규제로 재건축 사업이 지연된 곳이 적지 않다. 지난해 오세훈 시장 취임 이후 신속통합기획 도입 등으로 점진적인 정상화 단계를 밟고 있지만 분당, 일산 등 신도시 지역이 특별법으로 사업에 속도를 내면 형평성 논란이 불거질 수밖에 없다. 지방과 기타 수도권 지역에 있는 노후 단지도 같은 이유로 불만을 나타낼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