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연료 키운 친환경의 역설…정제마진 4배 뛰었다

탄소중립이 세계적 화두가 되면서 정유사들이 노후 설비를 폐쇄하고 증설이 줄어드는 추세다. 공급이 부족한 가운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산 화석연료 제재가 심화되면서 LNG(액화천연가스) 대체제인 석유제품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천연가스와 석유제품이 비싸지자 석탄 화력 발전량까지 늘고 있다. 정유사의 친환경 전환에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0일 정유업계에 따르면 5월 둘째주 기준 싱가포르 복합정제마진은 배럴 당 24.2달러로 연초 6달러 대비 4배 이상 급등했다. 전고점인 2011년 배럴 당 15달러보다도 높은 사상 최대 마진이다. 정제마진은 휘발유나 경유 등 석유제품 가격에서 원유 가격과 수송·운영비 등 각종 비용을 뺀 금액으로 업계에선 통상 약 4달러를 손익분기점으로 인식한다.


국제 유가가 배럴 당 110달러 수준까지 치솟은 상황에서 이 같은 정제마진 고공행진은 이례적인 현상이다. 당초 정유업계는 유가가 오르면 수요가 떨어져 정제마진이 떨어질 것을 걱정했지만 공급 부족이 심화되면서 정제마진이 오히려 올랐다. 세계 3위 산유국이자 석유제품 수출국인 러시아가 금수 조치를 당한 것이 우선적인 이유지만, 일각에선 전 세계 노후 정제설비가 폐쇄되고 순증설량이 줄어든 것도 정제마진 확대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다.

세계에서 정제설비 규모가 가장 큰 미국의 가동률이 92.5%로 높은 수준으로 상승했지만 석유제품 재고는 사상 최저 수준이다. 공급 부족에도 정유사의 노후 설비 폐쇄는 가속화되고 있다. 글로벌 탄소중립 요구가 거세지면서 노후화된 설비에 재투자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미국 최대 오일메이저 엑손모빌은 호주 정유시설 알토나를 연료수입 터미널로 전환한다. 영국 브리티시 페트롤리엄도 호주 최대 정유설비인 퀴나나를 폐쇄한다. 라이온델바젤은 2023년 말까지 미국 정제설비를 완전 폐쇄하기로 했다. 일본, 뉴질랜드 등에서도 노후 정유시설 폐쇄를 준비 중이다.

S-OIL 자료

순증설량도 줄어들고 있다. 지난해엔 약 30년 만에 처음으로 글로벌 순증설이 전년 대비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향후 5년 이상 정제설비 순증설 규모는 수요 증가보다 적을 전망이다. S-OIL은 올해 글로벌 석유제품 수요 성장이 하루 240만~370만 배럴로 예상되는 반면, 설비 순증설량은 하루 130만 배럴이라고 발표했다. 2025년엔 순증설량이 하루 10만 배럴로 수요의 10분의 1 수준일 것으로 예상했다.

전유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화석연료의 대체재가 아직 완전히 갖춰지지 못해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반면, 설비 투자는 이미 축소되기 시작해 구조적인 수급 불균형이 나타나고 있다"며 "중장기적으로 신규설비 유입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최근 러시아에 대한 제재로 글로벌 공급 차질까지 발생하고 있어 공급이 추가 감소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LNG와 함께 석유제품 공급도 부족해지자 가장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석탄화력발전량까지 늘어나는 추세다. 외신에 따르면 EU(유럽연합) 전체 발전량에서 석탄화력발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 10%에서 침공 이후 13%로 확대됐다. 같은 기간 독일의 석탄화력발전 비중은 25%에서 침공 후 37%로 크게 증가했다. 석유제품은 증설이 제한되면서 석탄 사용량이 당분간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일"이라며 "급속하게 정제설비 투자를 줄인 국가의 경우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 타격을 입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화석연료발전과 내연기관차 등의 역할은 최소 10년 이상 유지될 것으로 본다"며 "친환경 전환도 속도 조절을 하면서 2030년까지 화석연료, 석유제품의 공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노력까지 병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