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3만 시골마을, 망한 기업도 살린 '협동조합 천국'

생활속 조합
- 주민 3분의 2가 같은 협동조합원
- 400개 조합 활동 '지역경제 45%'
- 시장 대신 조합마트 이용 '생활화'

혼자보단 '함께'
- '조합간 협동' 안정적 일자리 제공
- 실업률 6.4%로 伊 전체보다 낮아
- 조합들의 협동조합인 '레가코프'
- 부도기업에 기금지원 조합 설립도

↑볼로냐 인근 산 라차로 디사베나의 어린이집 ‘라치코냐’는 민·관 연대방식으로 어린이집 건설비용은 3개 협동조합이 공동 부담하고 부지와 운영비는 볼로냐시가 지원한다. 볼로냐에는 라치코냐 등 11개의 어린이집이 운영되고 있다. 보육교사는 조합원이 대다수이고 3∼4개 보육원을 1명의 교육전문가가 맡아 교육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서울시

　이탈리아 중부 에밀리아로마냐 지방의 주도인 볼로냐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산라차로디사베나시. 인구 3만명의 조용한 이 시골마을에 들어서자 지붕에는 태양열판이 있고 외관은 알록달록 밝은 색깔로 꾸민 건물이 우선 눈에 들어왔다. '라치코냐'(La Cicogna)라는 어린이집이었다.

　라치코냐는 돌봄서비스 협동조합인 카디아이가 시와 함께 진행하는 '카라박(KARABAK) 프로젝트'를 통해 2009년 1월에 설립됐다. 여기서 만난 한 교사는 11년째 일하고 있었다. 임신했을 때 근무시간을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고 5개월의 출산휴가 기간에 평상시 급여의 100%를 받는 등의 혜택이 주어진다.

　16명의 교사 중 15명이 조합원이다. 카디아이 관계자는 "'카라박 프로젝트'는 공공기관과 협동조합이 협력해서 일자리를 만들고 질 좋은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이라고 설명했다.


◇400개 협동조합 활동…지역경제 45% 차지
　볼로냐가 속한 에밀리아로마냐주(州)엔 5336개 협동조합에 22만7871명이 고용돼 있다. 이들이 지역경제를 선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지역 총생산의 30%를 협동조합과 중소기업이 담당하는 등 볼로냐는 이탈리아에서 협동조합이 가장 활성화돼 있는 지역으로 꼽힌다.

　볼로냐에선 400여개의 협동조합이 활동한다.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약 45%에 달할 정도다. 이 지역의 실업률은 6.4%(지난해 10월 기준)로, 이탈리아 전체(10.6%)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그래픽=최헌정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의 정태인 원장은 이탈리아 전체 협동조합 4만3000여개 중 1만5000여개가 에밀리아로마냐 지방에 있다"며 "볼로냐경제를 밑받침하는 것도 수많은 협동조합"이라고 설명했다.

　볼로냐에서는 농민협동조합, 소비자협동조합 등 여러 협동조합 형태를 볼 수 있다. 소비자뿐 아니라 건설, 노동, 서비스 등 전분야에 걸쳐 있다. 시민의 3분의2가 1곳 이상의 협동조합에 가입돼 있을 정도다. 협동을 통한 생활방식에 익숙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인 셈이다.

　일례로 볼로냐 주민들은 "시장에 간다"는 말 대신 "콥(cooperativa·협동조합)에 간다"는 말을 쓴다. 주변에 테스코(Tesco) 등 체인형 대형마트가 있지만 자신의 지역에서 생산된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협동조합 마트를 이용한다. 자신들의 지역 제품을, 자신이 조합원으로 가입한 마트에서 사는 것이다.

　이탈리아 전지역에 114개 조합을 가진 코프(Coop)는 연매출이 132억유로에 조합원수가 7703만3334명에 달한다. 이중 볼로냐에 있는 코프아드리아티카가 가장 큰 조합이다. 코프아드리아티카에 등록된 조합원수만 110만명이 넘고 매출도 20억유로에 달한다. 조합원도 매년 5만명이 늘고 있다.

　일자리도 제공한다. 코프아드리아티카 직원의 86%가 조합원이고 94%가 정규직이다. 지역 농산물 판매를 원칙으로 하며 발생한 매출이나 수익은 그대로 해당 지역에 재투자한다. 코프아드리아티카의 아드리아노 투리니 회장은 "조합원들에게 가격과 질 모두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코프 아드리아티카는 로마냐 지방 전부와 에밀리아 지방의 볼로냐에서 매장을 운영하는 소비자 협동조합이다. 이페르 코프(Iper Coop) 등을 비롯한 대형 쇼핑몰 18개와 중·소형 쇼핑몰 142개를 운영하고 있는데 매출액만 19억4900만유로(약 2조9000억원)에 달한다. ⓒ서울시 제공

　◇협동조합간 협력으로 일자리 확대…컨소시엄 구성 활발
　협동조합은 개인이 혼자서는 실현할 수 없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여럿이 힘을 합하는 것이다. 협동조합 사이에 협동이 가장 잘되는 곳이 볼로냐다. 보육시설인 라치코냐가 협동조합 컨소시엄의 좋은 사례다.

　교육과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협동조합인 카디아이뿐 아니라 급식노동자협동조합 '캄스트', 건축노동자협동조합 '치페아' 등 3곳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운영한다. 볼로냐엔 라치코냐 등 11개 어린이집이 운영된다.

　특히 유치원을 짓는데 드는 비용은 협동조합이 공동으로 부담하고 운영비는 지방정부에서 지원받는다. 협동조합끼리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해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카디아이 관계자는 "시에서 부지를 제공하고 운영비를 지원하는 대신 25년 후 유치원 소유권을 시로 이전한다"면서 "조합원들은 이 기간에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코프아드리아티카도 마찬가지다. 조합원들이 가입비(25유로)를 내고 가입하기 때문에 조합원서비스에 최선을 다한다. 조합원은 할인쿠폰은 물론 코프가 발행한 카드로 서점·식당에서 할인도 받는다. 투리니 회장은 "값싸고 안전하고 품질 좋은 제품을 공급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다"며 "판매물품의 75% 이상을 조합원들이 사고 있다"고 강조했다.

ⓒ서울시 제공

　◇'혼자보다는 함께'…망한 기업도 살리는 협동조합
　볼로냐의 협동조합들은 혼자보다는 함께하는 방법을 택한다.

　이탈리아의 최대 협동조합 연합체 레가코프도 마찬가지다. 간단히 말해 '협동조합들의 협동조합'인 레가코프엔 이탈리아 전역에서 1500개 이상의 협동조합이 가입했고 2만5000명의 직원과 40만명의 조합원이 소속돼 있다.

　각 협동조합은 수익의 3%를 협동조합개발기금(코프펀드)으로 낸다. 모은 돈으로 다시 새로운 협동조합을 결성하거나 작은 협동조합의 성장을 돕는다. 실제 한 건설기업이 부도나자 직원이 협동조합을 조직한 뒤 레가코프의 지원을 받아 협동조합기업으로 재탄생한 경우도 있다.

　레가코프 볼로냐지부 관계자는 "코프펀드를 통해 기금은 물론 재정컨설팅 등 조합 설립의 모든 것을 지원했다"고 설명했다.

　BCC(Banche di Credito Cooperativo)와 같은 신용협동조합은행의 발달도 협동조합 활성화에 한 몫하고 있다. 이탈리아 전역에 412개 신협과 4411개 지점이 있는데 에밀리아로마냐주에만 23개가 있다.

　BCC의 운영원칙은 지역사회 중심의 사업을 한다는 것이다. 50% 이상을 조합원들과 거래하고 사업의 95%가 지역사회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익이 나면 70%를 조합유보금으로 두고 30%는 조합원들에게 이윤배당을 한다.

　BCC 관계자는 "최근 유럽의 경제위기로 대출이 줄어드는 등 영향을 받고 있다"면서도 "지난 130년 동안 지속된 지역사회와 함께하면서 축적된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