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C, 美셰일에 '전쟁' 선포..."유가 100달러 복귀 멀었다"

머니투데이

김신회 기자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대량무행동무기'(Weapon of Mass Inaction)를 휘둘렀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7일(현지시간) OPEC이 이날 오스트리아 빈 총회에서 산유량 한도를 동결한 것을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 그러면서 신문은 OPEC이 '전쟁'을 선포했다며 국제 유가가 세 자릿수(배럴당 100달러대)로 복귀하기까지는 수년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대량무행동무기'는 미국이 북한과 이라크 등 자국 안보를 위협하는 국가들의 핵무기와 화학무기 등을 거론할 때 쓴 '대량살상무기'(Weapons of Mass Destruction)를 빗대 쓴 말이다. OPEC의 이번 결정이 그만큼 미국에 위협이 된다는 뜻이다.

OPEC은 이날 총회에서 2011년 하루 3000만배럴로 정한 산유량 한도를 동결하기로 결정했다. OPEC은 다만 산유량 한도를 엄격하게 지키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OPEC 회원국들은 원유시장 점유율을 유지하느라 한도를 훌쩍 웃도는 원유를 생산해왔다. WSJ는 기존 산유량 한도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하루 30만배럴 정도의 감산효과를 볼 수 있지만 국제 유가 반등을 유도하기엔 역부족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OPEC이 국제 유가를 떠받치려면 산유량을 하루 100만-150만배럴은 줄여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OPEC은 내년 6월 다시 모여 감산 여부 등을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OPEC은 그동안 산유량 감축으로 국제유가 하락에 대응해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국제유가가 급락했을 때는 하루 420만배럴 규모의 감산을 단행했다. 최근 국제 유가 하락이 가속화하자 시장에선 OPEC이 다시 감산에 나설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이날 국제 원유 선물가격이 급락한 것을 보면 기대감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국제 유가 기준물인 브렌트유 선물은 지난 6월 배럴당 112달러를 웃돌았던 게 이날 72.58달러까지 추락했다. 4년여 만에 최저치다. 5개월 새 35%가량 떨어진 셈이다. 이날 하루 낙폭은 6.65%로 2011년 이후 최대를 기록했다.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6.30% 급락해 4년 만에 처음으로 배럴당 70달러 선이 붕괴됐다.

전문가들은 OPEC을 주도하는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가 셰일개발에 한창인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유가 하락을 용인하기로 한 것으로 풀이했다. 미국이 셰일개발로 산유량을 대거 늘리며 국제 유가를 떨어뜨린 만큼 셰일개발을 좌절시켜야 한다는 게 사우디의 판단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OPEC이 전 세계 원유시장을 움켜쥐고 있었지만 미국이 사우디를 능가하는 산유국으로 부상하면서 OPEC, 특히 사우디의 시장 장악력은 위태로워졌다.

베네수엘라와 이란과 같은 OPEC 회원국은 브렌트유 가격이 각각 배럴당 160달러, 130달러는 돼야 예산균형을 맞출 수 있지만 사우디를 비롯한 걸프연안 국가들은 유가 하락을 좀 더 용인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사우디와 쿠웨이트는 국제유가가 각각 배럴당 90달러, 50달러 선으로 떨어질 때까지 재정적자를 면할 수 있다.

사우디는 OPEC의 감산에 따른 유가 상승이 오히려 막대한 돈이 드는 미국의 셰일개발을 부추길 수 있다고 우려한다. OPEC은 미국 셰일개발업체들이 본전치기를 할 수 있는 유가 수준을 배럴당 53-78달러로 추산하고 있다.

제이미 웹스터 IHS에너지 원유 담당 에널리스트는 "(OPEC의 감산 합의 불발을) 가격 전쟁이라고는 하지 않겠지만 미국 셰일산업에 매우 공격적인 시험대가 될 것돲이라며 돱OPEC이 새로운 첫 수를 뒀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업계에선 국제 유가 하락세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러시아 국영 석유회사인 로스네프트의 이고르 세친 회장은 브렌트유 가격이 내년 상반기에 배럴당 60달러 밑으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노르웨이 최대 투자은행 DNB마켓의 토브욘 추스 선임 애널리스트는 "미국의 산유량 증가세를 둔화시킬 수 있는 국제 유가 수준이 얼마나 되느냐가 관건"이라며 "하루 140만배럴이나 되는 미국의 산유량을 50만배럴 수준으로 낮추려면 유가가 얼마가 돼야겠느냐"고 되물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분석에 따르면 미국이 생산하는 셰일원유 가운데 국제유가가 배럴당 80달러 이상이 돼야 수익성을 높일 수 있는 건 4%밖에 안 된다. 미국의 주요 셰일원유 산지인 노스다코타, 몬태나주의 바컨(Bakken)에서 생산하는 셰일원유는 배럴당 42달러 이하에서도 수익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IEA는 미국의 산유량이 내년에 하루 100만배럴 가까이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OPEC이 산유량을 줄이지 않는 한 유가가 반등하기 어렵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