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은의 폴리티션!]'성완종 스캔들' 돌파구, '클린턴현상'에 답 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일으켰던 수많은 스캔들은 다른 정치인이라면 정치 생명이 몇 번이고 끝날 수 있는 치명적인 것들이었다. 그의 정치인생에서 가장 큰 악재이자 정적은 본인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에 당선됐고 재선에 성공했으며 명예롭게 퇴임했다.

미국 정가에서도 20세기 최대의 미스테리니, '클린턴 현상'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이례적인 일이다. 그에게 정치 스캔들이 치명적인 위기로 작용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클린턴 행정부 시절 미국 민주당은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을 정치인 개인의 도덕성 문제에서 정책 중심의 가치 아젠다로 이동시킨 강력한 정책 플랫폼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니퍼 플라워즈와의 12년 혼외정사와 마리화나 흡연 사건, 병역 기피 문제 등 자신과 관련해 불거진 각종 스캔들을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로 대표되는 정책 이슈로 압도했다.

냉전 시대에서 경제전쟁 시대로 변화하면서 만성적인 '쌍둥이 적자'와 실업 문제 등을 해결해 성장 동력을 높일 수 있는 정책 과제를 제시하고 국민들의 삶에 직결되는 수많은 '스몰 딜(small deal)'들의 정책을 쏟아낸 것이 재선까지 이어지는 원동력이 됐다.


그가 대통령 재임 당시 일어난 '르윈스키 스캔들'에 대처한 방식도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준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르윈스키 사건'이 세간에 알려진 직후 이뤄진 신년 연설에서 스캔들에 대해선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모든 재정 흑자의 1센트까지 21세기 사회보장체계를 강화하는 데 쓰겠다"며 사회복지와 관련된 새로운 정책 비전을 제안함으로써 정국을 타개했다.

이 연설로 클린턴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무려 11%포인트 급등했다. 그가 '부적절한' 처신으로 탄핵 위기를 맞게 되는 과정에서도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에 대해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고 이것이 그의 대통령직을 지탱해주는 힘이 됐다. 강력한 정책 아젠다 앞에서 클린턴 개인의 정치 스캔들은 무력화된 것이다.

이러한 '클린턴 현상'은 정책 위주의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클린턴 전 대통령의 능력과 함께 이 시기 민주당의 정책 플랫폼 구축 전략에 기인한 바가 컸다.

미국 민주당 지도위원회와 그 산하의 진보정치연구소는 대통령 한 사람의 자질이나 능력을 초월해 지속가능한 보다 근본적인 정책 플랫폼을 구축하기 위해 기회의 균등과 상호책임, 자율 세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강력한 정책 기반을 형성했다. 클린턴 행정부와 함께 토니 블레어의 영국 노동당 집권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한 '제3의 길'의 출발점이다.

정책 플랫폼에 기반한 민주당의 집권 전략은 버락 오바마 정부의 탄생에 이어 최근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유력한 대선 주자로 떠오르는 과정에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이른바 '이메일 스캔들' 등의 거짓말 논란에도 큰 타격없이 대세론을 형성하고 있다.

4·29재보선 선거운동이 시작된 16일 경기 성남 중원구 황송노인종합복지관을 찾은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김문수 보수혁신위원장이 '성완종사태'와 관련해 성남평화연대 관계자들의 항의를 받으며 복지관으로 들어서고 있다. 2015.4.16/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라는 부패 스캔들에 휘말린 한국 정치는 여전히 정치인 개인의 도덕성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줬다. 여야 정치권은 '성완종 리스트'를 무기 삼아 서로에게 총구를 들이대며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고 있다.

사태가 터지기 직전 여야 정치권에서는 경제를 중심으로 중도 노선의 정책 플랫폼을 건설에 경쟁적으로 나서는 움직임이 본격화되던 참이었다. '정치는 정책, 정책은 정치'라는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정책 경쟁이 정치권 화두로 떠오르기도 했다.

진영 논리에 갖혀 적대적 공존에만 매몰됐던 우리 정치 문화에서 참으로 의미있는 변화다. 동시에 정치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긍정적 역할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킬 수 있는 계기로 기대됐다.

'성완종 블랙홀'이 모든 정치 이슈와 정책 과제를 빨아들이고 있는데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이럴 때 일수록 부패 스캔들의 수렁에 빠진 정치를 건져내는 해답은 바로 정책 중심의 정치로 변화하려는 노력에 있다는 생각이다.

한국 정치의 '클린턴 현상'은 '정치 대 반(反) 정치'의 낡은 구도를 타파하고 '정책 대 정책'의 정치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과연 누가, 어느 정당이 먼저 나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