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플레 아니다”…한국은행의 이유있는 항변

서울 한 재래시장 모습. /사진제공=뉴스1

최근 전문가들 사이에서 한국이 디플레이션(물가하락, 생산감소로 인한 경기침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한국은행이 “사실상 디플레이션으로 볼 수 없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냈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해 11월 ‘한국경제가 1990년대 디플레에 빠지기 직전의 일본과 닮은꼴’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해 디플레 논쟁의 불씨를 키웠는데 이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성격으로 풀이된다.

한은은 28일 발표한 ‘소비자물가중 가격하락 품목수 증가의 원인과 평가’ 보고서에서 소비자물가를 구성하는 481개 세부품목의 최근 가격변화 분석결과를 통해 “우리나라의 품목별 가격 움직임은 일본의 디플레 진입기와 상이한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 한국이 디플레가 아닌 이유= 한은은 △가격하락 품목 수가 광범위 하지 않다 △가격하락 품목이 유류 관련 제품 등 특정제품이 집중된 모습이다 △가격하락이 수요감소보다 공급증가 영향이 더 크다는 3가지 논리로 디플레가 아니라는 입장을 나타냈다.

가격하락 품목은 2011년~2012년 79개에서 2013년~2015년 126개로 47개 증가했고 물가상승률은 2011년~2012년 3.1%에서 2013년~2015년 1.2%로 하락했다.

수치상으로 디플레 현상이 진행 중인 것처럼 보이나 개별 품목들의 가격변화를 들여다보면 디플레가 아니라는게 한은의 판단이다.

한은이 2011년~2015년까지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구성하는 481개 제품 가격변동을 분석한 결과 계속 가격이 하락된 품목은 8%, 2013년 이후로 가격이 떨어진 품목은 17%였다. 반면 이 기간 가격이 계속 오른 품목은 68%, 2013년을 기점으로 상승 전환된 품목은 6%로 집계됐다.

가격하락 품목은 주로 유가 관련 제품, 농산물, 서비스 요금에 집중됐다. 2013년부터 지금까지 가격이 하락한 47개 제품은 가공식품(13개), 농산물(11개), 기타공업제품(9개), 개인서비스(6개), 석유류(5개) 등이었다.

먼저 농산물 가격은 재배기술 발달과 기상여건 호조로 공급이 늘어난데 따른 것으로 파악됐다. 경기침체로 인한 수요감소가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라는 얘기다. 또한 70여개 주요 농산물 가격이 2010년~2012년 34% 가량 올랐다가 되돌림한 점도 최근 가격하락에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다.

일부 공산품은 원화강세와 유가하락으로 가격이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가공식품류와 일부 생필품은 환율에 따른 수입물가 하락, 대형유통업체 경쟁에 따른 유통마진 감소 등으로 가격이 떨어진 것으로 파악됐다.

이와 함께 최근 3년 연속 가격이 떨어진 TV, 스마트폰 등 전자제품은 기술개발로 생산효율성이 높아진 영향 때문이고 국제항공료와 사립대·국립대 납입금 인하는 서비스요금 물가상승률을 낮췄다는 평가다.

◇ 일본과 다른 한국의 물가현상= 한은은 보고서를 통해 90년대 초반 디플레를 겪은 일본과 현재의 한국은 상황이 다르다고 강조했다. 디플레는 장기간 광범위한 품목의 가격이 크게 떨어져야 하는데 한국은 이런 요건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2013년~2015년 가격하락 품목수가 전체 조사대상의 26% 안팎이었으나 일본은 디플레 초기인 1993년 34%의 품목이 가격이 떨어졌고 1994년에는 47%, 1995년에는 52%까지 가격하락 품목수가 확대됐다.

또 특정제품 가격하락 폭이 커서 전반적인 물가하락세를 더 돋보이게 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석유류 등 물가기여도가 높은 품목 위주로 가격이 크게 떨어진 것도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일본은 1994년 물가하락 206개 품목 중 고등어, 양배추, 오이 등 8개 품목만 가격이 10% 이상 하락했지만 우리나라는 올해 1~4월 가격이 내린 127개 품목 중 휘발유, 경유, 자동차용LPG, TV, 배, 복숭아, 학생복, 도시가스, 국제항공료 등 22개 품목이 10% 이상 가격이 내렸다.

김웅 한은 조사국 물가동향팀장은 “디플레 정의가 광범위한 품목의 장기간 가격하락임을 감안하면 현재 우리나라는 디플레 국면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며 “과거 일본이나 최근 미국, 유로존과 비교해 가격하락 품목 수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고 대체로 농산물과 석유류 관련 제품에 집중된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한은은 이런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앞으로 물가하락세가 광범위한 품목으로 확산될 가능성은 낮다고 강조했다. 또 하반기부터 물가상승률이 오르면서 내년에는 올해 유가하락 기저효과로 물가상승률이 적정 수준인 2%대를 회복할 것으로 예상했다. 디플레 발생 가능성이 상당히 낮다고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