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 영업부서 '비상'…조선사에 '갑'에서 '을'로 변신중

동국제강 당진공장에서 선박, 해양플랜트 건조에 사용되는 후판을 생산하는 모습. /사진=동국제강

조선업계 불황과 중국산 저가 철강재의 범람이 국내 철강업체들이 그동안 조선업체에게 군림하던 '갑질'을 줄여나가고 있다.

7일 업계에 따르면 조선업체와 철강업체의 후판 계약관계는 기존의 공급자(철강업체) 중심에서 수요자(조선업체)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과거 조선업체의 여신한도를 문제 삼으며 과도한 선수금을 요구하던 관행도 점점 사라지는 추세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조선업체의 불황에 기인한 바가 크다. 조선업은 제조원가 중 재료비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그 중 후판 비중이 15% 가량을 차지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전세계 신조선 발주는 시황 악화에 맞춰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조선해운분석기관 클락슨에 따르면 올해 1~3분기 전세계 선박 발주량은 2434만CGT(가치환산톤수)였다. 이는 지난해 1~3분기 발주량인 3619만CGT의 67.3% 수준이다.

신조 발주가 줄어들면서 철강사 후판 영업부서들은 비상이 걸렸다. 은행 여신이 바닥난 조선업체에게도 일단 요청이 오면 후판공급에 나서고 있다. 한 철강사 영업담당 직원은 "자칫 부실채권으로 돌아올 위험이 크더라도, 마땅히 물량을 밀어낼 곳이 없어 일단 계약을 맺은 뒤 사후관리를 강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철강업체들의 저자세 계약에도 불구하고 후판 내수판매량은 지난해에 비해 줄고 있다. 포스코, 현대제철, 동국제강의 올해 상반기 후판 내수 판매량은 356만8000톤을 기록해 지난해 상반기에 비해 4.8% 줄었다.

저가 중국 철강재의 고급화 역시 국내 철강업체들의 후판 영업에 타격을 주고 있다. 2008~2009년도까지만 해도 국내 조선업체들의 국산 강재 이용률은 90%가 넘었다. 일부 일본에서만 생산하는 5% 가량의 특수 철강재를 제외하고는 국내 철강 3사 후판을 공급받았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당시에는 선주사와 계약 논의할 때 무조건 포스코 강재 사용한다고 대답해야지, 중국산을 일부라도 사용하겠다고 언급하면 계약이 꼬이는 일도 있었다"며 "요즘은 중국 제품 쓰겠다고 하면 브랜드를 물어보고, 대형업체 브랜드면 선주사도 용인해주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중국업체들의 역량 강화로 국내 조선업체들의 중국강재 적용 비율도 높아지고 있다. 고부가가치 선박이 아닌 범용 상선 등의 경우, 중국산 비율이 50% 가까이 되는 경우도 있다. 10여곳의 중국 철강업체들은 국내에 판매대행 직원을 두고 조선업체 강재 공급망을 확장하고 있다.

조선업계에서는 이 같은 현상을 반기는 기류도 있다. 한 조선업체 관계자는 "과거에는 후판 단가 인하 요구를 받은 철강사에서 공급을 1주일씩 미뤄서 조선 공정이 3~4주 차질 빚는 사례가 종종 발생하기도 했다"며 "수요 감소와 중국산의 경쟁력 강화로 후판 영업사원들의 '갑질'이 사라지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철강업계에서는 조선사의 중국산 강재 의존도가 높아질 경우 국내 산업생태계가 무너질 수 있다며 주의를 요구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중국산 강재가 시장을 잠식한 뒤에도 지금과 같은 저렴한 가격으로 강재를 공급할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라며 "국내 후판 생태계가 무너진 뒤에 후회해도, 그때야말로 '울며겨자먹기식'으로 비싼 중국산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