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누가 와서 확 베어주기만 기다리는 입춘"

천경자의 그림이나 서승은 작가의 그림에 나와 있는 인물화는 인간과 식물(꽃 또는 다육식물)이 동일시된다. 화관으로 장식한 그림이나 다육식물로 머리를 장식한 인물화는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류경무의 신간 시집 ‘양이나 말처럼’에서도 식물과 동물과 화자가 동일시되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앞에 언급한 화가의 그림과 같이 시적 표현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는 파격적이다. “제가 제 모가지 툭 자르고 싶은 새잎”(‘새잎이라는 짐승’)처럼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음과 일체화된다. 또,“한아이가 긴 하품을 하며 돋아”(‘새잎이라는 짐승’)나기도 하고 “새잎의 짐승들이 마구 솟구쳐 오르기도”(‘새잎이라는 짐승’) 한다.


얼음 툭 부러진다 아직 이 양지는 춥다
갈 데까지 가버린 그늘이
짙푸른 입술이 말한다

누가 와서 저 햇빛 좀 막아달라고
그러면 햇살이라 일월신검,

얼음은 스윽 제 목을 벤다
그래 네 목 네가 자르는 거 참 유쾌한 일
흰 눈 위 뚝뚝 떨어지는 피 참 즐거운 꽃

마루 끝에 앉아서
누가 와서 확 베어주기만 기다리는 입춘
- ‘입춘’ 전문

이러한 괴기스러운 문장은 경쾌한 봄의 이미지에만 있지 않고 시집 도처에 숨겨있다. 시인은 “얼음은 스윽 제 목을” 베기도 하고 “누가 와서 확 베어주기만 기다리는 입춘”으로 표현한다. 꽃이 피는 장면을 “흰 눈 위 뚝뚝 떨어지는 피 참 즐거운 꽃”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닭들이 우는 일은 이즈음 봄꽃들이 제 모가지를 꺾는 일과 같다”(‘백마리 닭’)고 비유하듯 시인의 자의식은 일반적이지 않은 반복적인 구체성을 띠고 있다. “한 움큼 집어 입속에 말아 넣으면/죽은 것들도 살아날 것만 같은”(‘봄’) 재탄생을 원한다. 시인은 “죽어라 그대가 죽기 전에, 라는 이슬람 수피즘의 강령(이문재 시집 해설)과 일맥상통한다.

시인의 글쓰기는 다음과 같은 고백에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생성보다는 재생의 관점에 다가가고자 한다. 새로운 생성의 가치보다는 재생(recycle)의 가치에 매력을 느낀다.” (시인의 말 중에서) “짧은 순간이었지만/그때 나는 새의 알몸”(‘벌거숭이 새’)을 보듯,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찰나의 순간을 통해 시인의 내면세계와 문학적 사유를 보여준다.

이러한 시의 형태는 끊임없는 구별불가능과 식별불가능으로 이어지는 윤회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류 시인의 시가 독자에게 전달되는 방식은 새의 깃털을 모아 날개를 만든 이카로스처럼 뜨거운 태양에 녹거나 바다에 떨어져 죽는 시처럼 순간의 의미부여를 담고 있다.

◇양이나 말처럼= 류경무 지음. 문학동네. 140쪽/72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