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ℓ 주세요' 소용없어" 주유기 조작 지능화…피해자 '속수무책'

경찰이 주유량 변조 프로그램이 부착된 주유기 전자기판에 조작 명령어를 입력하고 있다. /사진제공=서울지방경찰청

주유량 조작 기술이 날로 진화하고 있다. '가득'도, '○만원어치'도, '○○ℓ 넣어주세요'도 모두 통하지 않을 만큼 수법이 교묘해졌다. 관련 범죄는 점차 지능적으로 변하지만, 소비자가 피해를 예방할 방법은 마땅찮다. 현재로선 불법 주유소 적발·처벌 등 사후 대책만이 전부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주유량 변조 프로그램이 부착된 주유기를 이용, 정량보다 3~5% 정도 적게 주유하는 방법으로 13억원 상당 부당 이득을 챙긴 주요소 업자 등 일당 36명을 검거했다고 17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주유기 전자기판에 미리 입력된 특정 명령어를 조작하면서 주유량을 수시로 조절했다. 손님이 오면 정량에 미달하는 기름을 넣고, 단속 의심 차량이 들어오면 정상으로 되돌려 주유하는 식이었다.

주유량 조작 수법은 갈수록 진화하는 추세다. 2012년 경기 군포시에서 영업하는 한 주유소 업자는 통상 손님들이 주유를 주문할 때 '○만원어치' '가득' 등으로 요구하는 점을 노려 주유기에 △3만원 △5만원 △7만원 △가득 버튼을 따로 만들었다.

이후 업자는 손님이 버튼에 설정된 금액으로 주문할 땐 기름이 4~6% 적게 들어가고, 리터(ℓ)로 주문할 땐 정량 주유되도록 주유기 내 프로그램을 조작했다. 주유 업자들은 이같은 수법을 두고 일명 '기판 조작'이라 부른다. 한국석유관리원에 따르면, '기판 조작' 등 수법을 쓰다 적발된 불법 주유소는 △2011년 22개소 △2012년 73개소 △2013년 81개소 △2014년 85개소 △지난해 123개소로 해마다 증가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소비자단체인 에너지·석유시장감시단은 지난 5일 '주유소 이용팁'을 내고, 기름을 주유할 때 금액 대신 "20ℓ씩 주문하라"고 조언했다. 한국석유관리원 등 감시 당국이 정량 검사 기준 용량으로 20ℓ를 삼고 있어 업주가 해당 주유량은 선뜻 조작하기 어렵단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마저도 앞으론 예방책이 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번에 경찰이 적발한 주유량 조작 수법에서 업주는 손님이 주문하는 방식에 상관없이 주유량을 임의로 조작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프로그램을 한번 조작하면 되돌리기 어려웠던 과거 기법과 달리, 간단한 버튼 입력이나 전원을 껐다 켜는 등 방법으로 손쉽게 정량 주유로 기기를 복구, 단속·적발을 피하기 수월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기기 조작 후 정량에 못미치는 주유량./ 사진제공=서울지방경찰청

전문가들은 점차 교묘해지는 주유량 속이기 수법에 소비자들이 사실상 당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국석유관리원 관계자는 "마음 먹고 덤벼드는 불량 주유업자들을 상대로 손님들이 정량인지, 미달인지 명백하게 구별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조작 여부를 알아채려면 일정한 운전습관을 가진 소비자가 매일 동일한 길로 2~3개월 가까이 같은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어야만 감지할 수 있다"며 "현실적으로 소비자의 적발이 어려운 만큼 결국 감시 당국이 수시·불시 단속을 늘리고 조사를 철저히 하는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선 주유기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도록 보안모듈 등으로 원천봉쇄하자고 말하지만, 이 역시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이 관계자는 "주유기가 노후화되면 업자들은 토출량 보정 작업을 거치는데, 이때 허가받은 사설 업체들이 일손 부족한 지자체를 대신해 기기를 손 본다"며 "이같은 이유로 애초 주유기 자체를 만지지 못하도록 조치할 순 없다"고 밝혔다.

'20ℓ 주문'을 조언한 송보경 에너지·석유시장 감시단장도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주유 시장에서도 신종 조작 수법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며 "더이상 소비자 스스로 사전에 예방하는 게 어렵다면, 엄중한 단속과 처벌밖에 해답이 없다"고 말했다.

송 단장은 또 "보이스피싱이 기술 발전에 힘입어 걷잡을 수 없는 범죄로 거듭났듯이 주유 조작 수법도 당장 뿌리 뽑지 않으면 향후 더욱 교묘해질 게 뻔하다"며 "그 때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 몫"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