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독립과 고립 사이

한국은행은 외롭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주열 총재는 외롭다.

‘한국판’이든 ‘선별적’이든, 어떤 이름을 붙이든 간에 부실기업 구조조정을 위해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야 한다는 ‘양적 완화’ 논란 때문이다.


강봉균 전 새누리당 선거대책위원장의 ‘한국판 양적 완화’나 박근혜 대통령이 말한 ‘선별적 양적 완화’는 모두 조선·해운업에 물려 부실화되고 있는 수출입은행과 산업은행을 지원하는 것이다.

전자는 한은이 산업은행이 발행한 산업금융채권, 주택금융공사가 발생한 주택저당증권(MBS)을 인수하게 하는 것이고 후자는 한은이 산업은행에 출자하는 것이다.

둘 다 한은이 돈을 찍어 내는 점에서는 같지만 다른 점도 있다.


산금채를 사 주는 것은 기업 구조조정에 필요한 실탄(유동성)을 산은에 주겠다는 의미다. 산은의 부채와 이자가 늘어나고, 정부의 보증과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다.

한은이 산은의 후순위채를 인수하거나 직접 돈을 넣는 것은 실탄 공급이라는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산은의 건전성이 나빠질 수 있고 이 경우 돈을 조달하는 게 어려울 수 있어 대비하겠다는 것이다.

한은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으나 정부는 산은법을 고치면 된다고 보고 있다. 한은법이든, 산은법이든 법을 바꿔야 하므로 국회를 거쳐야 한다.

이같은 양적 완화의 목적은 기업구조조정이다. 구체적으로는 조선과 해운, 특히 조선업의 구조조정을 위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신용경색과 경기부양을 위해 돈을 푸는 일반적 의미의 양적 완화와는 다르다.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어떤 방식이 됐든 조선·해운업에 물린 돈 때문에 수은은 이미 자기자본비율이 9%대로 내려갔고, 산은 역시 수은처럼 되지 않도록 미리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누가 총대를 메느냐는 것이다. 정부는 긴급사안이므로 추가경정 예산을 편성하면 너무 늦다고 한다.

총선 등 정치일정을 고려하느라 시간도 소모했고, 수주절벽과 마주한 국내 조선소들의 도크가 비어 가고 있어 수은, 산은의 자본확충도 절박함이 더해진 건 맞다. 게다가 예산 편성 과정 자체가 까다롭고 어렵기도 하다.

정부가 부인하겠지만 국회 심의 과정에서 산은이 대주주인 대우조선해양의 부실과 분식회계 의혹 등이 쟁점사항으로 떠오를 테니 이를 회피하거나 혹은 재정투입에 대한 책임론도 모면하기 위한 심리도 작용하는 듯하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여당을 비롯해 청와대,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등이 한은 등을 떠밀고 있는 모양새다.

한은 입장에서 보면 '양적 완화'를 하는 것은, 금리를 내리는 것과는 부담의 차원이나 강도가 다른 일이다. 한은은 "왜 정부가 져야 할 책임을 한은의 몫으로 돌리느냐"며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한은은 늘 독립성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지만, 한은 총재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는 자리다. 이총재도 이같은 절차에 따라 박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았다.

한은은 여느 공공기관처럼 경영평가를 받지 않지만 예산안을 정부로부터 승인받아야 하는 제약도 있다.

이런 한계 위에서 한은은 여당, 대통령과 정부 등의 ‘양적 완화’ 공세 앞에 홀로 서 있다. 그렇다고 한은이 '양적 완화'를 반대하는 야당에 손을 내미는 것도 부적절하다.

한은의 무기는 “중앙은행이 특정 업종의 구조조정에 대한 지원을 할 수 없다”는 원칙과 “중앙은행에 재정의 역할을 맡기려면 국민적 합의와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는 명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친정부적이고 비둘기파 성향으로 분류되는 한은 금융통화위원들이 어떤 의사결정을 할지, 궁극적으로는 이총재가 어떤 판단을 할지, 세상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독립을 추구하든, 고립에 빠지든 지금 한은은 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