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만으로 성공을 살 순 없다"… 기적의 동화 쓴 '레스터 시티'

레스터시티 서포터./사진=AFPBBNews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 축구팀 레스터 시티 FC(이하 레스터 시티)가 한 편의 동화를 썼다.

레스터 시티는 리그 2위 토트넘이 3일(이하 한국시간) 영국 런던 스탬퍼드 브릿지에서 열린 2015~2016 EPL 36라운드에서 첼시와 2대 2로 비기면서 남은 경기와 상관없이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탄탄한 자본을 바탕으로 매년 수천억원을 써가며 유명선수를 영입하는 소위 '빅클럽'들을 제치고 차지한 우승이어서 잉글랜드를 비롯한 전세계 축구팬들의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1992년 EPL이 새롭게 출범한 이후 1994~1995시즌 우승한 블랙번 로버스를 제외하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첼시FC, 맨체스터 시티, 아스널만이 리그를 제패했을 정도로 우승의 벽은 철옹성처럼 단단했다.

'돈으로 성공을 살 수 있다'는 말이 통용되던 EPL에서의 이번 레스터 시티의 우승이 '기적'이라고 평가받는 이유기도 하다. BBC·가디언 등 영국 언론들도 "5000분의 1의 확률을 극복하면서 스포츠의 가장 위대한 동화가 완성됐다"고 레스터 시티의 우승을 축하했다.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레스터시티 감독./AFPBBNews=뉴스1

◇0.02%의 우승 확률…레스터 시티 선수 전원 몸값=손흥민 이적료
1884년 창단한 레스터 시티는 불과 두 시즌 전 2부리그에서 프리미어리그로 승격돼 올라온 팀이다. 지난 시즌엔 하위권을 맴돌며 2부 강등을 걱정했었다. 올 시즌 초만 하더라도 주전 11명의 이적료(약 420억원)를 다 합쳐봐야 토트넘으로 이적한 손흥민의 이적료(400억원)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시즌 개막 전 도박사들이 점친 우승확률도 5000분의 1(0.02%)에 불과했다. 한정된 예산으로 유명하진 않지만 가능성 있는 선수를 찾아 발굴해서 빅클럽들과 경쟁해야하는 EPL 내의 전형적인 중소축구팀이었다.

레스터 시티 변화의 첫 신호탄은 지난해 7월 이탈리아 출신 클라우디오 라니에리(65) 감독의 부임이었다. 라니에리 감독은 나폴리, AS로마, 유벤투스, 인터 밀란(이상 이탈리아), 첼시(잉글랜드), 발렌시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이상 스페인) 등을 지도한 경험이 풍부한 노장이다.

무너진 팀을 리빌딩해 상위권으로 올리는 실적은 유럽내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1부리그서의 우승은 번번히 실패하면서 여러 팀을 전전하는 감독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 앞에는 '실험가' '여행가' '만년 2인자' '소방수' 등이 따라다녔다. '실력은 좋아도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평이 딱 들어맞았다.

첼시에서 그가 해임당한 뒤 부임한 조세 무리뉴도 "내가 2004년 첼시에서 라니에리 감독을 대체하게 됐을 때 왜 감독을 바꾸냐고 물어봤었다. 첼시 구단 관계자들은 우승을 바라는데 라니에리와 함께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답했다. 라니에리가 첼시에서 루저로 생각되는 건 내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했었다.

라니에리는 2014년 그리스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은 후 4개월 만에 경질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레스터 시티에 부임하자 소식을 들은 잉글랜드 대표 출신의 명 공격수이자 현재 방송인으로 활동중인 게리 리네커는 "라니에리? 정말?"이라는 트위터 멘션을 남길 정도였다.

골을 넣고 기뻐하는 레스터 시티 선수들/AFPBBNews=뉴스1

◇'미생(未生)들의 구단'에 맞춤 전략 적용…'선수비 후역습'
새로 부임한 라니에리는 레스터 시티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팀으로 만들었다. 라니에리는 상대팀보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자신의 팀에 맞는 색깔을 입혔다. 기술이 뛰어난 선수들을 많이 보유한 팀들이 주로 펼치는 점유율 축구를 포기한 것.

라니에리가 택한 전술은 짜임새 있는 수비를 펼친 후 뒷 공간을 노리는 롱패스를 이용해 빠른 역습을 하는 것이었다. 조직력을 바탕으로 '선수비-후역습'을 주로 전개했다. 공을 뺏은 후 빠르게 공격하는 이 방식은 상대팀 선수보다 볼 컨트롤 기술이 뛰어나지 않은 레스터 시티 선수들에겐 효과만점이었다.

그들은 밀리다가도 역습을 통해 얻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득점을 성공시켰다. 그런 뒤 다시 수비로 돌아선 후 기회가 오면 재차 공격에 나섰다.

특히 비길 뻔한 경기를 한 점 차 승리로 이기는 승부를 자주 연출하면서 리그 선두 싸움을 시즌 초반부터 이어갔다. 차근차근 승점을 쌓으면서 23라운드 이후엔 단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다가 결국 우승을 이뤄냈다.

올 시즌 전까지 레스터 시티 소속 선수 중 유럽 무대에서 주목받던 선수는 거의 없었다. 레스터 시티의 우승을 이끈 주역인 스트라이커 제이미 바디(28)와 리야드 마레즈(25)는 말그대로 '밑바닥부터 기어올라온' 선수였다.

바디는 2007년 잉글랜드 8부리그의 아마추어팀인 스톡스 브리지 파크 스틸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주급은 30파운드(약 5만원)였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오전엔 치료용 부목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오후엔 축구 훈련을 해왔다. 그는 5부리그 플리트우드 타운을 거쳐 2012년 5월 레스터 시티에 합류한 뒤 팀의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이끈다.

빈민가에서 알제리 출신 프랑스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마레즈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체계적인 축구 교육도 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전술을 이해 못하는 선수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특유의 드리블 능력과 패싱 기술을 바탕으로 테크니션 플레이어로 성장한다.

바디는 올 시즌 22골로 득점 순위 3위에 자리했고 마레즈는 17골 1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올 시즌 활약을 바탕으로 바디는 잉글랜드 국가대표 공격의 핵심으로 떠올랐고 마레즈는 영국프로축구선수협회(PFA)가 선정한 '올해의 선수'로 뽑혔다.

이미 유럽 내 명문축구팀들이 올 시즌 뒤 두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 수백억원대 이적료를 준비 중인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만년 2인자에서 '기적의 사나이'가 된 라니에리 감독의 몸값도 당연히 급등했다.

레스터 시티는 라니에리 감독과 이미 계약 연장 논의를 시작했으며 이탈리아 축구협회 등을 포함해 많은 구단과 축구협회는 그의 영입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선수와 감독뿐 아니라 우승을 차지한 레스터 시티도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영국 언론 매체들은 "132년 만에 리그 첫 우승을 차지한 레스터 시티가 얻을 경제적 효과는 1억5000만 파운드(약 2496억원)에 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3일(한국시간) 2015~2016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는 소식을 들은 레스터시티 팬./AFPBBNews=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