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우리가 할 일은 삶의 고통 응시…다음 작품은 '혼'에 관한 것"

소설 '채식주의자'로 세계 3대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이 24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의 한 카페에서 열린 신작소설 '흰' 출간 기자간담회에 참석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맨부커상 당시 오히려 담담했다"고 털어놨다. /사진=이기범 기자

"지금 쓰고 있는 작업으로 얼른 돌아가서 (작업을) 하고 싶어요. 제가 더 드릴 말씀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글을 써가며 책의 형태로 여러분에게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제 방에 숨어서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인 최초 그리고 역대 최연소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 그러나 소설가 한강의 삶은 변함없이 오롯이 쓰는 행위에만 집중돼있었다.


◇ "맨부커상 수상 당시 오히려 담담해…번역가 데보라 신뢰한다"

24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열린 신작 '흰' 기자간담회에서 만난 한강은 언제나처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운을 뗐다.

"(수상 이후) 돌아와서 달라진 점을 잘 모르겠어요. 바라건대 아무 일 없이 예전처럼 살고 싶어요."


완성 11년, 출간 9년이 지난 소설이 해외에서 뒤늦게 주목을 받은 것은 한강 자신에게도 얼떨떨한 일이었다. 맨부커상 수상자로 호명되던 현장에서도 오히려 담담했다고 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건너 이렇게 먼 곳에서 이 소설(채식주의자)에 상을 준다는 것이 좋은 의미로,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기쁘다는 생각보다 '참 이상하다' 느낌이 들었죠."

데보라 스미스와 함께 진행한 번역작업이 녹록지 만은 않았다. 문장 하나를 두고도 이메일을 수없이 주고받았다. 특히 5·18 광주민주화항쟁을 다룬 '소년이 온다'는 역사적인 맥락을 설명하기 위해 한 문장당 3페이지 가량의 설명을 보내주기도 했다.

"번역이 원작에 충실하다는 것의 기준은 감정과 톤을 (잘) 전달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는 한강은 데보라의 번역이 그가 눌러쓴 고통의 질감을 그대로 옮겨놓았다고 호평했다.

특히 '채식주의자'에서 영혜가 독백하는 부분이 만족스러웠다. 그는 "그 부분의 느낌을 정확하게 제 관점 그대로 번역했다고 느꼈다"며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해 신뢰를 가지게 됐다"고 했다.

한강의 신작 소설 '흰'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흰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사진제공=출판사 난다

◇ 신작 소설 '흰'…"인간의 존엄한 지점 바라보고 싶었다"

한강의 소설은 질문과 답으로 끊임없이 연결된다. 한 소설의 말미에 질문을 던지면 그다음 소설에서 답을 찾는 식이다.

그는 '소년이 온다'에서 "압도적인 폭력의 상황에서 존엄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후 "인간의 존엄한 지점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나온 신작이 소설 '흰'이다.

"'소년이 온다' 말미에 어린 소년 동호가 엄마 손을 잡고 밝은 쪽으로 끌고 가는 대목에서부터 탄생했어요. '더럽혀지지 않는 것, 무엇으로도 훼손되지 않는 것'이 분명히 우리 안에 힘있게 존재하지 않나란 생각이 들었고 그 지점을 책으로 써보고 싶었어요."

2014년 폴란드 바르샤바에 머물며 쓴 '흰'은 제목 그대로 '흰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강보, 배내옷, 달떡, 안개, 흰 도시, 각설탕, 흰 돌, 백발, 수의, 소복, 연기, 눈, 손수건…그는 '흰 것'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세계대전 당시 (도시의) 90%가 폭격으로 파괴됐다 재건된 바르샤바와 닮은 사람을 상상했다"는 그는 배내옷이 곧 수의가 되고, 강보가 곧 관이 된 '언니'의 사연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형식의 경계도 무너졌다. 산문으로 시작한 글은 허구인 언니의 존재로 소설로 마무리됐다. 때론 시를 읽어나가는 듯한 느낌도 준다.

한강은 "새로운 형식을 써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쓴 건 아닌데 쓰다 보니 어떤 한 페이지는 시가 되기도 하고 '언니'의 존재를 상상하며 (쓰니) 소설에 가까워졌다"며 "실험하려는 의지 없이 써 가다 보니까 실험적인 형식이 돼 버린 특별한 경험"이라고 했다.

소설가 한강은 24일 열린 신작 '흰' 기자간담회에서 "인간의 존엄한 부분을 바라보고 싶었다"고 밝혔다. /사진=이기범 기자

◇ "다음 작품은 '혼 3부작'…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삶의 고통을 응시하는 것"

'흰'은 2017년 겨울 영국 출간을 목표로 데보라 스미스가 번역 중이다. 책에는 미디어 아티스트 차미혜의 사진이 함께 담겼다. 차미혜와 한강은 다음 달 3일 서울 성북구의 스페이스 오뉴월이주헌에서 '소실.점' 전시회를 개최한다. '흰'의 주제를 한강이 직접 글 대신 몸짓으로 표현한 퍼포먼스 영상을 선보인다.

한강은 '혼 3부작'에 매진할 계획이다. 지난해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인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의 연작이다. 이 작품과 같이 혼령이 찾아오는 이야기를 두 개 더 낼 예정이다.

그는 "(찾아오는) 혼들이 왜 그런 삶을 살았던가를 살펴보는, 아주 조그맣고 연약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며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조금씩 다듬어 써보려고 한다"고 했다.

한강은 왜 이토록 지독한 삶의 고통을 마주하는 걸까. 그는 "어렸을 때부터 가깝든 멀든 이 세상 어디엔가 고통받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가 제겐 커다란 숙제였다"고 고백했다.

"우리가 편안하고 평화롭게 산다고 해서 우리 삶이 평화로워질 순 없는 거예요. 우리 삶에 다른 사람들의 삶도, 현재와 과거도 다 들어와 있기 때문에 고통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응시하는 것이고 우리 삶의 일과로서 같이 가야 하는 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