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더미 채무자'에서 '호감 MC' 이상민, "불행이 한꺼번에 찾아와 감사"

이혼과 빚으로 5년간 술과 절망으로 보낸 혼성그룹 룰라의 리더이자 래퍼 이상민. 그는 2012년 케이블 방송 엠넷의 '음악의 신'으로 복귀하면서 호감 스타 이미지를 획득했다. 최근 공중파 출연까지 이어져 가장 '핫'한 40대 스타 대열에 합류했다. /사진=임성균 기자

가수 이상민(43)에게 거세된 건 웃음만이 아니었다. 까칠하게 몰아붙이던 과거의 말투나 일방적 언사도 모두 사라졌다. 목석처럼 요지부동하지 않고 조곤조곤 낮고 느린 톤으로 속삭이듯 얘기하는 그에게서 잠시 수도승 같은 이미지가 스쳤다.

냉기를 지나 온기에 접할 듯 자박자박 경계의 순간에 그는 서 있는 듯했다. 조바심을 내지는 않았으나 조심스러웠고 목소리 톤이 높지는 않았으나 귀에 박힐 만큼 새김질이 또렷했다.


은막에서 사라졌다 돌아온 스타처럼 그는 그렇게 나타났다. 비만에 폭음, 이혼과 부도, 우울증과 공황장애 등 여러 명이 한 번씩 겪을 법한 불행한 인생을 혼자 거머쥐고 살아낸 그는 현재 국내 연예계에서 가장 '핫'한 스타로 부상 중이다. 불혹이면 서서히 잊힐 시기지만, 그는 인생을 다시 '스타트업'했다.

혼성그룹 룰라의 리더이자 래퍼였던 이상민. 90년대 잘 나가던 그 시절에도 그는 예능 한번 출연하지 않을 정도로 카메라 앞에서 무뚝뚝한 캐릭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더 벙커' 시리즈를 통해 '네고 리'라는 별명을 지닌 수완 좋은 MC로, '음악의 신' 시리즈에선 허세와 진솔의 이중주 연기로 시청자의 열렬한 호응을 얻고 있다.

지난 9일 서울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잊고 싶은 과거 얘기를 들추면 민망하지 않을까 같은 노파심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는 여전히 차분한 태도로 상대방의 눈동자가 '이제 그만'이라는 신호를 보낼 때까지 상세하게 솔직하게 털어놨다.


이혼-빚-횡령… 케이블 방송 만나기 전까지 술로 매일 밤 지새

"40대 아직 죽지 않았어." 한동안 잊혔다가 각종 프로그램에서 뛰어난 입담과 진행 솜씨를 과시하는 룰라 출신의 이상민. 그는 부활의 표시로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포즈를 취했다. /사진=임성균 기자

-거의 잊힌 가수로 남을 뻔했는데, 40세 불혹의 나이에 다시 살아났다.

▶이혼에 사업 빚에, 사기횡령 혐의로 공중파 방송 출연 정지에 매일이 고통의 나날이었다. 적어도 2012년 초, 그러니까 내 나이 39세 때까지 나를 잘 몰랐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술 없이 살 수 없었다. 매일 저녁 술을 마셨고, 몸무게가 85kg까지 불었다. 옛날 팬이 나를 못 알아보든, 아저씨가 되든 내가 알 바 아니라는 생각이 강했다. 그때 만난 게 '음악의 신'이라는 방송이었다. 이 프로그램 담당 국장이 '과거 이상민의 모습은 겉치레였으니, 진짜 이상민의 모습을 약 올리게 다뤄보자'고 했다. 나를 '곤란'하게 한다는 대목이 재미있어서 방송 출연에 나서게 됐다.

-절망이 컸던 시기에 방송 출연은 쉽지 않았을 듯한데, 진짜 이유가 무엇이었나.

▶'이상민 스토리'로 짜면 진짜 내 얘기를 할 수 있으니까. 스스로 잊고 살았던 내 모습을 볼 수 있고, 내 인생에 연결된 사람들을 오랜만에 만날 기회도 생기니까 결정했다. 무엇보다 나를 골탕먹이겠다는 방송의 의도가 좋았다. 늘 독특하고 특별한 걸 선호하는 편이어서 거부하기 어려웠다. 진지하게 접근했으면 사양했을 것이다.

어릴 때 그의 꿈은 부자였다. 일기장엔 "성공하면 자동차를 사겠다"는 글이 수없이 적혀있다고 했다. 그리고 룰라로 성공했을 때 그가 가장 먼저 손에 쥔 품목은 스포츠카 '사브900 컨버터블'이었다. 부도로 파산에 이르렀을 땐 외제 차의 '외'자도 꺼내기 힘들 만큼 아이러니한 현실의 주인공이 된 이상민. '더 벙커'라는 자동차 프로그램에서 그가 단숨에 대중적 인지도를 획득한 것은 차에 대한 지식과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일반인의 간절함을 동시에 품에 안았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의 기획부터 제작까지 직접 참여해 의논했어요. 모든 과정을 '내 호주머니에 돈이 있다면…'에서 시작해 철저하게 구매자 입장에서 방송했죠. 그래서 (중고차 구매에서) 더 많이 깎을 수 있었고 더 많은 혜택이나 서비스를 제공했는지 몰라요."

아직 청산중인 부채 69억원…정신 차리니 우울증·공황장애 찾아와

-없는 자의 마음을 비로소 이해했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게 과거와 달라진 점인가.

▶옛날에는 성질도 급했고, 어떻게든 내 식대로 표현하려고 애썼다. '나 충분히 성공했으니 알아줘야 해'라는 식이었다. 몰라주면 더 까칠하게 다가섰고, 누가 말해도 '변명하지마' '토 달지마'하며 남의 얘기는 조금도 듣지 않았다. 지금? 은하계 앞에 놓인 먼지 같은 생명의 인생으로 나 자신을 볼 뿐이다. 아주 작은 존재인데, 무엇에 그리 집착하고 욕심을 부렸는지….

-방송하기 전까지 빚이 48억원이라고 들었다.

▶부도났을 때 생긴 빚이 그 정도 규모다. 방송하면서 드러나지 않은 빚들이 있었는데, 그게 20여억 원이다. 내가 대주주이자 대표이사로 떠맡겨진 부채들이 모두 69억 원 정도 됐다. 지금도 계속 빚을 갚고 있다. 크게 따지면 6개 사업을 했다. 홈쇼핑, 패션, 온라인쇼핑몰, 레스토랑, 아카데미,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동시에 운영하면서 부동산 시행사업이라는 곳에 투자까지 했다. 결정적인 손해는 두 개 아이돌 그룹에 투자하면서 발생했다. 그걸로 한 20여억 원의 손실을 봤다. 30대에 많이 벌고, 많이 까먹은 셈이다.

-그 정도 빚이면 삶의 의지조차 꺾였을 텐데.

▶성공만큼 실패도 컸다. 그런데 보통 큰 게 아니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고통이 하나씩 왔다면 그 무게에 지쳐 쓰러졌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고통이 한꺼번에 찾아왔다는 것. 그건 완전 다른 세상이었다. 절망의 나날을 보내려면 그럴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전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채권자 수십 명의 시달림과 재판 일정 등이 한꺼번에 닥치다 보니, 밥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2, 3년의 세월이 훌쩍 지난 후였다. 그때(2007년)부터 매일 술을 마셨다.

기가 막힌 인생은 한꺼번에 찾아왔다. 2005년 이혼을 시작으로 화불단행(禍不單行)의 역사는 향후 5년간 그의 인생을 매섭게 지배했다. 수십억 원의 빚을 져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는 온라인 도박사이트를 운영하던 매형에게 돈을 받고 법원으로부터 '배당금을 받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일로 이상민은 2010년 공중파 방송에서 출연 정지를 당했다.

2년 뒤 케이블 방송으로 복귀했을 땐 자신도 모르던 병도 알게 됐다. "토크쇼를 하다가 (김)구라 형이 '너 왜 이렇게 한숨을 쉬느냐'고 묻길래, '형, 내가 한숨 쉬었어?'하고 되물었어요. 그렇게 병원을 찾았더니 우울증과 공황장애 진단이 내려졌어요. 병을 앓고 있었는데, 제가 억지로 숨기고 살았나 봐요. 현재 2년째 치료를 받고 있어요."

후회 목록, 실패 목록으로 반면교사…"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

-지금은 어떤가.

▶계획에 없는 것들이 들어오면 불안해진다. 사업과 사랑. 두 가지가 내 삶에 은밀히 들어오려고 할 때 그렇다. 가장 많이 바뀐 생각은 세상이 빠르게 변할 때 나조차 빠르게 갈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조금 느긋하게 가도 돼'라고 매일 스스로 합리화한다. 느린 마음으로 빠른 세상을 관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40대에 이르러 부자가 되는 꿈은 사라진 듯하다. 대신 얻은 게 있다면.

▶전문용어로 '내공'이라고 하는데, 그게 생겼다. 돈이나 공부로 쌓을 수 없는 능력 아닌가. 매일 나를 힘차게 걷게 하는 원동력이 그것이다. 과거에 이상민은 적응력 0%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지금은 어떤 사람을 만나도, 어떤 주제를 던져도 적응할 힘 80% 이상은 갖췄다. 지난 20년간 정말 많은 일을 겪었다. 내겐 후회 목록도, 실패 목록도 있다. 어떤 후배가 '정말 힘들어요'하고 찾아오면 그 순간 느끼는 바닥 같은 인생보다 더 깊은 바닥이 있다는 걸 지난 체험으로 알려준다. 그들이 엄청난 용기를 갖고 돌아가지 않겠는가.

-'물질적 가난'으로 아쉬움과 후회가 크지 않은가.

▶아니, 지금 너무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땐 단 1%의 행복도 못 느꼈다. 당시 주변에선 모두 나만 쳐다봤다. '쟤가 뭔가 해내겠지'하는 시선들, '나는 뭔가 해내야한다'는 강박감이 어지럽게 교차하던 시기였다. 거기에 나보다 잘된 사람에 대한 질투와 시기, 불평과 불만이 치솟아있을 때라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차를 타고 가다가 거리에서 모녀나 가족이 웃으며 걷는 풍경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나보다 돈 많은 사람은 단 1%도 부럽지 않고 나보다 행복지수가 높은 사람이 부럽다. 예전에는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았다. 지금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 하지만 방송국에 녹화하러 가면 도시락 주는 풍경에, 테이블에 깔려 있는 과자 하나에 행복을 느낀다. 지질하지만, 내가 도착하는 곳에 먹을 것이 있고 나를 행복하게 반겨주는 제작진이 있다는 걸 아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는 것 같다.

"누군가 계속 나를 지켜보고 있다"…행동→버릇→좋은 사람 '소박한 행복 3박자'

이상민은 인터뷰 내내 진지했다. 낮은 목소리 톤이었지만, 내용 전달은 또렷했다. 그는 "요즘 사소한 풍경들에서 행복을 자주 느끼고 있다"며 "산전수전 다 겪은 지난 경험에서 많은 걸 배웠다"고 했다. /사진=임성균 기자

-40대에 이르러 변한 인생의 가치나 철학이 있다면.

▶그런 생각 참 많이 하고 산다. 누군가가 지금 사실은 나를 지켜보는 중이라고. 나 말고 다른 40대들도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살면 조금 더 달라지는 삶을 살 거라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다. 그러면 행동을 잘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행동하면 버릇이 되고, 그 버릇은 결국 좋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 제 팬들이 '괜찮아, 우리가 있잖아' 이런 식으로 바라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지켜보는 중일 것이다. 이런 노력을 세상은 반드시 알아준다고 믿는다.

이상민은 지난 3년이 그전 30년 인생보다 더 값진 것이라고 말했다. 조심스러운 하루에서 깊은 행복을 맛보는 일, 그에겐 꿈이고 현실이었다. 부자가 목표였던 어릴 적 꿈은 시작부터 잘못된 명제였을까. 그는 "실패라는 조건을 염두에 두지 않은 무모한 도전"이라며 동의했다.

불혹을 넘긴 나이에, 그의 꿈은 세 가지로 모인다. 실패한 결혼의 상처를 결혼으로 다시 회복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다. 직업으로 택한 음악인으로서의 길에 대한 두 번째 목표에는 애정이 깊었다. "긴 시간 제가 한 직업이 음악 프로듀서였고, 마지막 나의 길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고요. 제가 절망과 고통의 시기를 보낼 때에도 제 머릿속엔 늘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었거든요."

여행은 마지막 꿈. 머릿속에서 멜로디를 그리듯, 여행을 통해 인생의 희망을 그리고 싶다는 것이다. "제 음악 하면서 아내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그런 인생 영위하고 싶어요."

이 소박한 꿈에 다다르기 위해 지난 인생이 가르쳐준 교훈은 맵고 썼다. 한숨과 고통을 뛰어넘고 만나는 인생 2막은 분명 달라져 있었다. 인터뷰가 끝난 뒤 90도로 인사하고 뒤로 돌아선 그의 등에서 따뜻한 웃음꽃이 송알송알 피어오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