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훈의 스테레오마인드]재미없는 세상을 재미있게

시작은 모 레이블 대표와 한가로이 평일 서촌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였다. “다음 달에 정말 좋은 뮤지션이 공연 때문에 와요. 음반 작업도 하면 좋을 텐데 비용이 문제네요.” 알고 지낸 지는 얼마 되지 않지만, 우리나라 음악계의 발전을 위해 정말 많은 애를 쓰고 있는, 그래서 비록 나보다 어리지만 존경스러운 마음마저 드는 그분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뭔가 도움이 되고 싶었다.

“까짓거 해봅시다. 그 돈 없다고 굶어 죽는 것도 아니고 저도 좋아하는 뮤지션인데 이번 기회 아니면 그 사람들을 언제 또 보겠습니까? 그리고 아시잖아요. 제 삶의 모토가 ‘재미없는 세상을 재미있게’라는 걸. 재미있을 것 같네요”라며 호기롭게 대답했지만 내 형편에선 절대 적지 않은 금액의 돈을 만드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리저리 궁리하다 결국 블로그를 통해 투자자를 받는, 일종의 크라우드 펀딩 형태로 하는 게 좋겠다고 결론을 내리고 블로그에 공지했다. 정말 놀란 건 공지를 하고 한 시간도 되지 않아 3000만원이라는 거금을 모았다는 것. 더구나 “아시다시피 지금 음반 시장은 시장이 너무 작고 그렇기에 지금 투자하신 돈은 회수할 확률이 아주 낮습니다”라는 말씀을 드렸는데도 일면식도 없는 분들께서 단지 내가 하고 싶어하고, 재미있는 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만한 돈을 모아주셨다는 데에 내가 아직 잘못 살고 있진 않았구나 하는 기쁨과 감사의 마음과 함께 돈의 무게와 그분들의 나에 대한 믿음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여러 번의 회의를 거쳐 선곡하고, 악보를 찾고, 그들이 왔을 때의 동선까지 모두 고려해서 숙소를 정하는 등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이 진행되도록 준비를 했지만, 시간은 늘 부족했고, 준비 과정에서 이미 지쳐갔지만, 그 과정 자체를 재미와 즐거움으로 여기고 일을 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서 뮤지션들이 오고, 공연을 하고, 드디어 녹음 날이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한 달 훨씬 전에 전달한 악보를 마치 처음 보는 악보처럼 연주하는 그들을 보고 뭔가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편곡을 다 끝마치고 녹음만 해도 모자랄 시간인데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연주하면서 편곡을 하다니 이건 우리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하는 생각과 함께 투자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레코딩 스튜디오 사용료는 생각보다 비싸다).


이런 식이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녹음을 중단하고 “당신네에게 정말 실망했다. 오늘은 녹음을 더 진행하는 게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좀 더 준비해서 내일 레코딩을 다시 시작하자”고 하고 스튜디오를 나섰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어 있었고 말 그대로 일사천리로 녹음이 진행되었다.

이렇게 팔자에도 없는 음반 제작이란 일을 하게 되었다.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 ‘내가 좋아하진 않지만 아이돌 가수 누구를 부르면 최소한 몇만 장을 팔 수 있을 거고, 그러면 십 년 된 차도 바꾸고 할 수 있을 텐데. 가수 누구랑 작업하면 큰돈을 벌 수 있을 텐데’ 등등의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욕심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눈을 가리는 법. 재미없는 세상을 재미있게 살자고 시작한 일이 어느새 재미없는 세상을 더 재미없게 바라보게 되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을 때 늘 격려와 후원을 아끼지 않던 지인의 말씀이 생각났다. “앞으로 넌 잘될 거다. 정말 잘 될 거다. 그래도 초심을 잃지 마라. 넌 그것만 하면 된다.”

그래, 난 초심을 잃었던 거다. ‘큰돈 좀 못 벌면 어때? 차 좀 오래 타면 어때? 재밌게 살면 되지.’ 이렇게 마음먹으니 한동안 부옇게 보이던 길이 다시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본 조비의 5집 앨범 제목이자 타이틀곡의 제목은 ‘신념을 지켜라’(Keep the Faith) 이다. 앨범 제작을 처음 할 때의 신념–비록 돈은 안 될지 모르지만 재밌게 사는 데 도움을 주는 일-을 지킨다면 앞으로의 삶도 재미있을 것이다. 큰돈? 이번 생에 안 되면 다음 생에 벌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