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훈의 스테레오마인드]친구의 큰 그림

“내가 이번에 사고가 난 것도 자전거 바퀴가 작아서 사고가 났던 거야. 자전거를 안 탈 수는 없으니 바퀴가 큰 걸로 하나 살게.” “안 돼. 사지마. 그만 사. 올해 자전거에 돈을 얼마나 많이 썼는지 알아? 그만 사.”

알고 지낸지 십 년이 넘은, 친구이자, 통장 관리인이자, 생명의 은인인 이 친구가 이렇게 단칼에 내 말을 거절하다니,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다. 내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도 아니고, 내가 내 돈 가지고 내 자전거 사겠다는데 못 사게 하다니! 이게 21세기를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민주시민 자세란 말인가? 더구나 내가 1천350만원짜리 샤방샤방 새 자전거를 사겠다는 것도 아니고, 중고 135만 원짜리 자전거를 사겠다는데 말이야.


하고 싶은 거 못 하고, 사고 싶은 거 못 사면 마음의 병이 되고, 마음의 병은 곧 몸의 병으로 이어지고, 몸의 병은 병원비로 이어지고, 분명한 것은 병원비가 중고 자전거 가격보다 많이 나올 것이기 때문에 지혜로운 소비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 자전거는 어떻게든 내 손에 들어와야 한다. 작전 개시.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 친구에게 그 자전거를 선물하는 것이다. 일평생 자전거는 타본 적이 없는 것 같고, 나와는 체격이 달라도 너무 달라 설령 선물해 준다고 하더라도 집에서 먼지만 쌓여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는 없는 살림에 친구를 위해 135만 원짜리 선물을 해주고, 그 친구는 나에게 본인의 불용품을 선물해주는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지지 않을까? 모든 계획이 완벽하다. 단 하나만 제외하고는. 안타깝게도 그 친구의 생일은 며칠 전에 지났다.

두 번째 계획은 유치하지만 효과는 확실한 단식투쟁. 밥을 한 끼만 굶어도 세상 무너지는, 자전거 낙차사고로 앞니가 두 개가 부러진 상황에서도 일식집까지 가서 전복죽을 사와서 밥을 먹는 내가 밥을 안 먹는다는 건 하늘이 놀라고 땅이 움직일 일. 하지만 진짜 굶을 수는 없으니 안 보는 데서 먹기 위해 몇 가지 반찬을 만들었다. 단식투쟁도 배가 고프면 할 수 없는 것이니까.


멸치를 볶고, 메추리알을 졸이고, 멍게젓과 굴젓을 담그고, 김을 사오고 해서 단식투쟁의 만반의 준비를 갖췄는데 이것을 눈치 챈 것일까? 밥 먹으라는 말도 없이 내가 만든 반찬으로 혼자 밥을 먹고 있다. 치사하게. 나흘 만에 작전 실패 선언.

다시 작전 변경 돌입. 이번엔 애교 작전이다. 좋아하는 호떡을 사다 바치니 “나 방금 밥 먹었는데?”, 밥을 먹고 설거지를 했더니 “내일 (도우미) 아줌마 오시는데?”, 연말에 무슨 공연 볼까 물어보니 이 세상에서 가장 구하기 어려운 티켓이라는 방탄소년단의 연말 공연 티켓을 네 장이나 구해달라고 하질 않나, “여보세요! 방탄소년단 공연 티켓은 방시혁 사장도 구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어요!!!” 결국 애교 작전도 실패.

마지막으로 궁서체 작전. 목소리에 진심을 담기 위해 평소의 캘리그라피 폰트 목소리를 버리고 궁서체 목소리를 장착했다. “나 진지하게 말하는데 그 자전거 필요해. 이제 나이 먹어서 뼈 다치면 잘 붙지도 않고 그래. 아직까지 그 자전거 안 팔렸으면 나 그 자전거 살 거야. 아직 안 팔렸으면 백만 원만 줘.”

2015년 연식에 딱 세 번 탔다는 이유만으로 원래 가격의 반값에 나온 자전거. 일반적인 평균 체형을 위한 크기의 자전거라면 나오자마자 팔렸을 텐데 우리나라 사람의 체형에는 많이 커서 찾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까지 안 팔리고 남아있었다. 심지어는 원래 나왔던 가격보다 15만 원이나 싸게.

이 모든 게 친구의 큰 그림이었을까? 어쨌든 그 다음날 자전거를 샀고, 올해 들어 가장 춥다는 날에 테스트하러 나갔다가 얼어 죽을 뻔 했다. 하지만 그깟 추위가 문제랴? 이제 브롬톤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