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해야 한다고?" 말 못하는 추행에 두 번 우는 여성

여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고소당한 안희정(53) 전 충남지사가 14일 오전 서울 서부지법에서 열린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혐의 1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고 법원을 나서고 있다./사진=임성균 기자

수행 비서 성폭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무죄 판결을 받자 여성들이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표현한 사실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거나 사건 전후로 정상적으로 업무를 수행했다고 해서 안 전 지사의 행동이 정당화 될 순 없다는 지적이다.

서울의 한 대기업에서 일하는 김모씨(31)는 안 전 지사의 무죄 판결을 보고 분노했다. 김씨 역시 피해자 김지은씨와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이달 초 가깝게 지내던 유부남인 남자 선배와 술자리 후 택시에 동승하다 손을 잡혔다. 김씨는 선배가 손을 잡은 채 업무 이야기를 하는 탓에 불쾌하다는 표시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다음날 출근한 선배는 김씨를 따로 불러 전날 일을 사과했다. 매일 얼굴을 맞대야 하는 같은 팀 선배라 김씨는 싫다는 소리도 못하고 "알았다"고만 했다.


하지만 일주일 뒤 선배는 김씨에게 업무상 논의할 것이 있다며 또 다시 둘만의 술자리를 제안했다. 김씨는 가족행사 핑계를 둘러대며 점심 시간대로 약속 시간을 바꾸느라 남몰래 속앓이를 해야했다. 김씨는 "추행이 있은 후에도 선배 앞에서 방긋 웃으며 식사도 하고 일도 했다"며 "이 사실을 회사에 알리면 다들 '문제 없이 회사 다녀놓고 무슨 얘기냐'며 팀장 편을 들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서울 모 사립병원에서 근무하는 레지던트 이모씨(27) 역시 병원 관계자들의 성추행에 선뜻 대응하기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이씨는 "교수들이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여성 레지던트들을 불러놓고 노래를 부르며 허리와 엉덩이 사이 쯤에 손을 걸치곤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평소 나를 아끼고 잘 지도해주시는 분이라 정색하고 싫다고 하기도 힘들다"며 "이런 일로 틀어졌다가 병원생활을 하기 힘들 것 같기도 해서 꾹 참는다"고 말했다.

◇"비동의간음죄, 도입돼야 하지만…처벌 범위 과하다는 우려도"


전문가들은 비슷한 사례가 되풀이 되는데도 처벌이 힘들기 때문에 여성들이 침묵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악순환을 해결하려면 안 전 지사의 재판부가 선고와 함께 언급한 'Yes means Yes' 혹은 'No means No' 룰 도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No means No 룰은 상대방이 거절 의사를 표시했는데도 성관계를 했을 경우 강간으로 보고 처벌하는 원칙이다. Yes means Yes 룰은 더 나아가 상대방의 명확한 동의 의사가 없는 모든 성관계는 강간으로 간주하는 원칙이다.

우리나라는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도 도입하고 있지 않다. 폭행이나 협박을 가하거나(강간) 위력으로 성관계를 맺은(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경우만 처벌한다. 피해자의 의사는 판결에서 중요치 않다.

천정아 변호사(법무법인 소헌)는 "우리나라 현행법에서는 가해자가 위력을 사용했는지를 피해자가 직접 입증하지 못하면 무죄가 될 수밖에 없다"며 "법원이 안 전 지사의 사례에서 인정한 직장상사의 (임면권 등) 위력이 화장실을 가거나 잠을 잘 때 사라지는 것이 아닌데 성관계 때 직접 위계를 내세우는 말 등이 없었다고 해서 무죄라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비동의 간음죄 도입 시도는 과거에도 있었다. 현행 형법이 개정됐던 2007년부터 논의가 활발하게 이어져 왔지만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번번이 흐지부지됐다. 다만 비동의 간음·추행죄가 도입되면 처벌 범위가 넓어진다는 이유로 입법화가 쉽지 않은 부분도 있다. 이재일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보는 "비동의간음죄는 지나치게 처벌 범위가 확대되면서 이를 역이용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며 "형법으로 범죄를 처벌하는 상황에서 판단 기준을 피해자의 의사에만 두면 이를 합리적인 범죄구성요건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