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佛, ECB 역할 두고 다시 '치킨게임'

프랑스가 유로존 재정위기 해법으로 '유럽중앙은행(ECB) 역할론' 카드를 다시 끄집어냈다. 그러나 독일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유로존의 불확실성이 다시 커지고 있다.

ECB가 유로존의 '최종 대부자'임을 선언하고, 위기 극복을 위해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은 진작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프랑스는 독일의 강력한 반대로, 지난달 하순 유럽 정상회담을 앞두고 'ECB 역할론'을 일단 접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상황이 악화되고, 트리플A(AAA) 최고 등급인 프랑스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등의 국채 금리마저 급등하자, 프랑스가 'ECB 카드'를 다시 들고 나왔다.

독일과 영국 사이에 금융거래세 도입을 두고 설전이 벌어진 데 이어, 다시 독일과 프랑스간의 갈등이 재연됨에 따라 위기 속 유럽의 분열상이 현저히 드러나고 있다.

◇"최종대부자 ECB가 유일 해법"=발레리 페크레세 프랑스 정부 대변인은 16일(현지시간) "ECB의 역할은 유로화 안정뿐만 아니라 유럽 금융시장을 안정시키는 것이며 이를 위해 ECB가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전날 "ECB가 유럽 위기 대응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프랑수아 바루앵 프랑스 재무장관 발언의 연장선상이었다. ECB가 금리가 급등한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국채를 과감히 사들이라는 주문이다.


프랑스는 나아가 기존에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주장하다 독일의 반대로 접었던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의 은행화 주장, 즉 ECB를 이용한 EFSF 가용 재원 확충 방안까지 다시 끄집어냈다. 바루앵 장관은 이날 EFSF의 은행화가 위기 전이를 막는 방법이라는 게 프랑스의 입장이라고 밝혔다.

은행권도 목소리를 높였다. 페데리코 기조니 유니크레디트 최고경영자(CEO)는 "부채위기에 빠져 자금 조달 문제가 커진 이탈리아 은행들을 위해 ECB에 자금 접근성을 높여달라고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키트 저크스 소시에떼제네랄 외환시장 리서치 대표는 "ECB가 '최종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로 역할을 바꾸기 전까지는 위기가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ECB 역할 강화론자들은 시장 불신에 따른 국채 금리 급등, 또 그로 인한 시장 혼란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ECB가 국채 시장을 지킬 최종대부자가 되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말한다. 특히 그동안 도출된 위기 해소 방안들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는 점도 ECB의 역할이 강조되는 이유다.

EFSF의 레버리지와 신흥국 참여는 미진하다. 현재 2500억유로인 실질 가용 재원을1조 유로로 증액키로 했지만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컨설팅 회사 스포트라이트아이디어스의 스티븐 포프 이사는 "EFSF는 증액돼도 바람직한 결과를 얻기에 충분하지 않다"며 "유럽이 살아날 유일한 방법은 ECB의 역할을 철저히 검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독일 국채와 다른 나라 국채 간의 스프레드에 제한선을 정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이탈리아 국채 금리를 7%가 넘지 않도록 하겠다고 ECB가 약속하는 것도 비슷한 방식이다. 이는 지금처럼 비공개적으로 개입하는 것보다 비용이 덜 든다. ECB의 선언을 시장이 신뢰하면 ECB는 실제로 국채를 사들이지 않아도 된다.

◇"ECB 국채 매입은 불법"=그리스 추가 구제안과 EFSF 강화 방안 등 그동안 위기 해법을 마련하는데 사사건건 깐깐하게 굴었던 독일은 ECB의 국채 매입에도 강력 반대하고 있다. 심지어 이것이 불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EU 조약을 근거로 하면 ECB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며 "시장 신뢰를 회복할 유일한 방법은 기왕에 합의된 경제개혁을 이행하고 EU 조약을 개정해 통합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옌스 바이트만 분데스방크 총재는 중앙은행이 나서 정부의 자금을 조달해 주는 이른바 '통화적 자금 조달'(Monetary Financing)을 ECB 국채 매입에 비유하며 EU 조약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독일은 특히 ECB의 국채 매입으로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초래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1920년대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경험했던 트라우마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바루앵 프랑스 재무장관은 "독일이 역사적 이유를 들어 ECB의 직접 개입에 문을 닫고 있다"고 비판했다.

독일은 또 ECB 국채 매입시 수혜 국가들이 도덕적으로 해이해져 긴축과 개혁을 미룰 것이라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관료세력도 대체로 이같은 이유로 국채 매입에 소극적이거나 반대하고 있다.

ECB 관료들은 최종대부자 요구를 계속 거부하며 각국 정부가 긴축과 개혁을 통해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마리오 드라기 신임 ECB 총재는 약 2주 전 "개입은 제한적이고, 일시적이어야 한다"며 "ECB는 금리 결정에 주력할 것"이라고 밝힌 이후 다른 말이 없다.

그러나 ECB 국채 매입이 EU 조약 위반이라는 독일 등의 주장에 대해 ECB 역할 강화론자들은 불법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다. 리차드 포르테스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는 "ECB가 유통시장에서 투자자들로부터 사들이는 것은 금지되지 않았다"며 "불법이라면 관료들은 벌써 감옥에 갔어야 하고 문제는 오히려 불규칙한 개입 때문에 시장에 불확실성이 더 커졌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ECB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기회복을 위해 지난 2010년 5월부터 채권 매입 프로그램 시행해 오면서 그동안 약 1870억 유로 규모의 국채를 매입했다. 이미 시행했던 방식을 보다 과감히 전개할 것인지 여부는 독일과 프랑스를 양축으로 하는 치킨게임의 승자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포르테스 교수는 "ECB는 매우 위험한 치킨게임에 빠져 있다"며 "결국은 메르켈과 사르코지가 합의해야 하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