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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신발을 뒤집어 울음을 꺼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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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2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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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김미정 시인 ‘물고기 신발’

[시인의 집]신발을 뒤집어 울음을 꺼내다
2002년 ‘현대시’로 등단한 김미정(1966~ )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물고기 신발’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후 슬픔·눈물·괴로움 같은 감정이 어떻게 시로 다시 태어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신발과 바닥, 그림자로 대변되는 수동적인 삶의 모습은 어둠 속에서 머물다 당신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새로운 삶에 대한 의지를 슬쩍 드러낸다.

예상치 못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는다. “불면의 창을 매달고 기차가 달려”(‘푸른 불면의 청바지’)오고, “꿈의 한가운데 구멍이 나 있”(‘밤의 출구’)고, “계단에 웅크린 채 가루가 되어가”(‘먼지들’)면서 “세상 모두 모르는 일”(‘입술에 내리는 비’)을 홀로 감내한다. 당신의 부재로 인한 불안과 불면, 고독은 축축하고도 물렁한 문장을 만나 나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완성해간다.

찍히고 또 찍히는
이것은 발자국 닮은 게임

찢겨진 눈물이 소실점이 되는

던져진다 더 이상 몽환적이지 않은 나선계단 속으로 꽂힌다 뾰족한 언어를 쏟아내는 밤의 표정을 본 적 있는가 소용돌이치는 시간이 나를 향해 달려온다 무수한 그림자의 방향으로 닳아 없어지는 손과 발들, 의미를 잃은 의미를 낳는다 이미 당신 손을 떠나

꽂히는, 던지는, 너덜거리는,
게임의 시작이다

-‘다트게임’ 전문


‘작은 화살’이란 뜻의 다트는 전쟁터에서 생겨났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 ‘30년 전쟁’에서 병사들이 부러진 화살촉을 던져 맞히기 내기를 한 데서 유래됐다. 사랑도 전쟁과 다르지 않다. 다트 보드처럼 일방적으로 당하기도 하고, 힘의 균형을 팽팽하게 유지하기도 한다. 서로 죽일 듯 싸우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사이좋게 지내기도 한다.

다트 게임에서 보드는 일방적으로 “찍히고 또 찍”히는 대상이다. 그런 면에서 다트는 “발자국을 닮은 게임”이다. 사랑하는 사람(여성)의 가슴에 무수히 상처를 남기는 잔인한 게임이라 할 수 있다. “찍히고 또 찍히는”을 ‘밟히고 밟히는’의 다른 표현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지평선 위 모든 점에서 나오는 선들이 소실점으로 향하듯, 이별의 상처는 “찢어진 눈물”이 되어 점점 당신에게 향한다. 사랑도, 이별도 “더 이상 몽환적이지 않은” 냉혹한 현실이다.

이별 전에 당신을 만나러 간다. 하지만 당신은 “뾰족한 언어를 쏟아”낼 뿐이다. “소용돌이치”며 날아오는 날카로운 비난에 내 삶은 “의미를 잃”고 만다. 하지만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다. 후회해도 소용없다. 한 번 더 다트에 꽂혀 “너덜거리”린 후에야 마음을 비운다. 비로소 새로운 삶을 시작할 마음을 먹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좁은 골목”(이하 ‘자꾸 뒤돌아봐’)과 횡단보도, “엘리베이터 7층 버튼을 누르며” 자꾸 뒤돌아보는 것은 미련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상자도 있을까

던져졌다 발길로 차였다 움직이는 것들이 멈춰서 얼음이 되거나 녹아버릴 때가 있어 너무 고요해서 세상 소리들이 투명해질 때

숨을 뱉는 것을 잊어버린
숨을 쉬거나 다시 펴도 흉터만 남은

빈 상자들이 쌓여 간다
차인 데 또 차여 폭발하듯 풍경 속으로 사라지는

나는 가끔 상자였다

시끄럽고 캄캄한 이름을 불러봐 누군가의 눈빛이 바닥이 되는 순간 손을 맞잡은 모서리가 아프다 예고 없는 불안을 껴안고 나뒹구는 표정들

언제나 어둠은 단호했다

-‘일인용 상자’ 전문


“6과 9 사이 안개가 가득하다”(‘안개 남자’), “외롭다고 누구나 급하게 먹는 건 아니에요”(‘안개 식탁으로 오세요’), “타인의 옷에 숨겨진 나신만 자꾸 생각나는 밤”(‘검은 별의 밤’) 등에서 알 수 있듯, 내 고통과 슬픔은 당신의 바람(당연히 시적 상황과 현실은 차이가 있다) 탓이다. 불륜은 거짓말을 낳는다. “위험한 처음처럼”(‘질문의 혀’) 변명하고, 사랑은 통째로 의심받는다. “의자 밖으로 나간 당신은 돌아오지 않”(‘형용사가 가득한 의자’)고, 나는 “신발을 뒤집어 울음을 꺼내”(‘명랑한 이별’) 이별을 준비한다.

하지만 다시 시작하는 삶도 순탄치만은 않다. “창밖에는 그녀와 커튼이 펄럭이고 지난밤 타오르던 침대가 젖어가”(‘착시’)는 상황은 아직 진행 중이다. 여는 시 ‘일인용 상자’는 “숨을 쉬거나 다시 펴도 흉터만 남은”, 까맣게 타버린 가슴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시작했는데 사람들의 “발길에 차”이는 빈 상자 신세다. 내 잘못이 아닌데도 세상의 비난은 나에게 향한다.

분명 잘못된 상황이지만, 나는 조용히 이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너무 고요해서 세상 소리들이 투명해질 때”까지 침묵한다.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괜찮은 척할 뿐이다. 주변에 나와 같은 처지의 “상자들이 쌓여”간다. 동병상련이다. 그중에 “말할 수 없는/말하지 않는”(이하 ‘입술에 내리는 비’), “잊어버린/잊을 수 없는” 것들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차인 데 또 차”이면서 폭발하지만 그 분노는 “누군가의 눈빛이 바닥이 되는 순간” 후회와 절망으로 바뀐다.

햇살은 조금 데운 우유
그래서 김이 나고
봄은 언제나 그렇게 밍밍하게 시작하죠

때론 말할 수 없는 일들이 필요해요
입술에 묻어나는 비릿한 시간들

모든 사건들이
둘둘 말아 한 줌이 되는 솜사탕처럼
달달해지려 발버둥 치는

꽃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온다 안경이 뿌옇다 불투명한 표정의 거리, 한 잎 한 잎 피어나는 고요는 몸을 낮추고 비명 새어 나오는 골목을 바라본다

표면을 핥는다 하지만 잊지 말았어야 했을까 봄은 쉽게 상한다는 것을, 이 순간 목련꽃 진 얼룩이 온몸으로 번진다 다시 눈앞이 뿌옇다

봄을 또 보낸다
누구와도 사랑하지 않은 채

-‘목련밀크’ 전문


“나를 물가로 데려가요, 당신”(‘물고기 신발’), “당신이 녹아 사라지고”(‘혀’), “당신이 사라진 숲”(‘숲으로’), “죽은 새들이 침대를 끌고 날아가고 있다”(‘나란한 밤’), “벽으로 걸어 들어가/ 거대한 벽을 열고/ 끝내 남자는”(‘스크린’), “당신이란 이름의 안개”(‘안개주의보’) 등을 감안할 때, 한때 사랑했던 당신은 지금 사후세계에 머물고 있다.

“타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검은 별의 밤’)고 했다. 실의에 빠진 나를 어둠 속에서 빛의 세상으로 인도한 것은 타인이다. 누군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사람으로 인해 인생의 봄이 다시 찾아온다. 끝내 “말할 수 없는 일들”, “모든 사건들”을 잊어갈 즈음 문득 “꽃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오고, 당신을 “잊지 말았어야 했을까” 묻는다. 애증이다. 아니다. 이쯤 되면 사랑이다. 곯아 터진 상처에서 새살이 돋아난다.

다시 “온몸으로 번진” 얼룩이나 뿌연 눈앞은 오롯이 내가 감당하며 살아가야 할 숙명이다. 이것 또한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과 마음이 끌리는 대로. 당신과 멀어졌던 거리가 다시 좁혀진다. “누구와도 사랑하지 않은 채” 다시 봄을 보낸다. 사랑은 각인이다. 아마 많은 봄을 또 그렇게 보낼 것이다. 그 힘으로 “비워진 문장들”(‘시인의 말’)이 활활 타오르고.


[시인의 집]신발을 뒤집어 울음을 꺼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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