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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신춘문예 대상] 뫼비우스의 띠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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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01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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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머니투데이 경제신춘문예] 정황수/단편소설

[경제신춘문예 대상] 뫼비우스의 띠
1.

존(John)이 공룡처럼 웅크리고 있는 강남 사거리 한국빌딩 15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여비서가 15도 각도로 허리를 굽힌다. 서구적인 얼굴에 키가 늘씬하고 볼륨 있는 몸매의 8등신이다. 아래 위 검은 슈트를 입고 어깨 쯤 내려오는 생머리를 묶었을 뿐인데 굉장히 섹시해 보인다. 비서가 안내한 곳은 강남 사거리가 훤히 잘 보이는 탁 트인 방이다. 아담한 손님 접대실, 두꺼운 회색 카펫에 가죽 소파가 덩그마니 놓여 있고 앞 유리 탁자 위에 장미 몇 송이가 꽂힌 꽃병 하나가 곁눈질하는 것이 전부다.

벽엔 진품인지 가품인지 모딜리아니 긴 목의 여자가 흐리멍덩히 눈을 뜨고 졸고 있다. 여비서가 따라 들어오며 마실 것 무엇을 준비할까요? 역시 15도 인사다. 진한 에스프레소가 될까요? 준비하겠습니다.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나간다. 커피가 오고 잔을 들어 천천히 코로 향기를 흠흠한 다음 아주 조금씩 입술을 적시며 즐기다가 고개를 젖혀 한숨에 홀짝 다 들어 마신다. 5분 정도 기다렸을까 응접실과 연결된 옆문으로 황택의 사장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들어온다. 오래 못 본 친한 친구를 만난 듯 환한 표정이다.

"어이구 존, 얼굴이 좋습니다. 건강하시지요? 이렇게 화창한 날씨에 귀한 손님이 오셔서 오늘은 대박입니다."
"예, 사장님도 건강미가 넘치는 걸 보니 아마 줄버디를 하셨나 보네요."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악수를 한 다음 약속이라도 한 듯 소파에 앉는다. 사장은 50대에 키 작고 배가 약간 나온 흔히 볼 수 있는 타입의 인물이다. 항상 상대방 기분을 높여주고 비루할 만큼 자신을 아래로 낮추면서도 그 밑에는 시퍼런 칼을 세우는 전형적인 장사치 근성이 있다. 겉으로는 화기애애해 보여도 서로 깊숙이 감춰진 카드를 내보이지 않은 채 인사치레만 한다.

존은 미국에서 나고 자란 교포 2세다. 브라운대학 MBA와 컬럼비아 박사과정을 이수한 두뇌다. 글로벌 투자회사 GS Investment에 스카우트되어 파생상품분야에 두각을 나타낸다. 어느 날 회장으로부터 비공개사모펀드 '골리앗'의 극동 아시아 담당 책임자로 일해 줄 수 있느냐는 간곡한 요청을 받고 지난 2년 동안 아시아 고객들을 만나고 있다. 30대 초반, 짙은 뿔테 안경을 쓰고 170cm 70kg 서양 기준으로는 조금 외소한 편이다. 공부벌레일 뿐만 아니라 펀드시장에서 세계 내놓으라 하는 눈치 9단들과의 돈의 전쟁을 대부분 승리로 장식할 정도다. 배짱이 두둑하고 예리한 판단을 앞세워 상대방의 혀를 두르게 하는 재주가 있다. 오죽하면 회장이 비밀리에 직접 가장 신임하는 사람에게만 부탁한다는 이 자리에 그를 앉혔을까.

한국 이름은 김민준이다. 그러나 편하게 존이라 부른다. 학교에서도 John Kim으로 통한다. 한국어는 서툴다. 어머니가 간단한 대화를 가르쳐주어 일상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하나 심각한 싸움판에서는 영어로 한다. 가끔 어머니를 위해 한국말을 쓰는 게 전부다. 황택의 사장 또한 겉모습과는 달리 인디아나 주립대학에서 MBA과정을 마칠 정도로 영어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지금 두 사람은 탐색전을 펼치고 있으니까 간단히 한국말로 인사를 주고받지만 심각한 업무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을 대비해 긴장한다.

"좋은 결론을 가져 왔으리라 믿습니다."
기선을 제압하려는 황사장이 운을 뗐다.

"고민하실 것 없습니다. 우리 합병은 대한민국에서는 전혀 법률적 하자가 없습니다. 만약 그쪽 회사가 이 합병으로 인해 손실을 입는다면 주주가치 손실이 비록 의무사항이 아니라 할지라도 인도적으로 보전을 검토할 용의는 있습니다."

다분히 동정적인 말투라 존의 미간이 일그러진다. 그래도 전보다 많이 누그러진 양보다. 대한민국을 쥐고 흔드는 굴지의 한국그룹의 대표기업인 한국물산 대표가 자존심 꺾어가며 돈으로 양보할 수 있다고 처음 밝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입 다물고 그룹 내 합병에 침묵을 지켜 달라는 요구이다. 존은 가타부타 즉답을 피한 채 가만히 상대방 눈만 맞추고 바라볼 뿐이다. 바다 같은 침묵의 무게를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이를 무마한 것도 노련한 황사장이다.

"합병일 1개월 평균 주식시장가치로 보전하는 것이 어떨까 하고 생각 중입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것이기 때문에 회계처리에 문제가 많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는 차후 협의해 나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다시 침묵 속에 황사장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존이 드디어 입을 연다.
"확실히 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이 합병에 반대합니다. 만약 하시려거든 영미법에 의거한 모든 주주들 자산 가치를 보호하는 차원이기를 바랍니다."

황 사장은 이 젊고 미혼인 한국인 2세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니까 나는 새도 떨어뜨려 어마무시하다는 '골리앗'의 극동아시아 담당대표가 되었겠지. 왜? 그같이 세계를 돌며 기업 사냥을 일삼는 회사가 우리 회사를 목표한 이유는 무엇일까? 앞에 앉은 이 사람 배후 세력의 작전이 무엇일까? 겉으론 태연하지만 소름이 돋는다. 10분인가, 침묵으로 상대를 제압하던 존이 벌떡 자리를 박차며 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탁자에 조용히 놓는다.

"오늘은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군요. 우리 의견은 여기에 충분히 밝혔으니 다음엔 그 대답이 무엇인가를 기대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갑작스레 인사를 건네고 답에 아랑곳없이 휑하니 나가버린다.

2.

GS 그룹 회장은 Mr. Robert Killman이다.(이하 Bob이라 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으로 조상이 오래 전 영국에서 호주로 죄수들을 이주시킬 때 휩쓸려 간 한 사람의 후손이라는 말이 있다. 여하튼 독특한 성[Last name]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이에 아랑곳 않고 뛰어난 머리로 스텐포드 MBA, 하버드 로스쿨을 거쳐 법학박사를 받고 GS그룹 법률자문으로 시작해서 각 부서 실무를 두루 걸친 후 회장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정확하고 예리한 판단과 풍부한 법률지식으로 합법적인 수익창출에 귀재라 불린다. 2m에 가까운 거구로 하얀 머리칼에 뱃살이 풍부한 60대 초반,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신사다. 누구나 한번 그 앞에 서면 풍채에 위압을 느끼고 우렁찬 목소리에 귀를 열며 명석한 해석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워싱턴에서 잔뼈가 굵은 국무장관 출신 Mr. Thomas McGowan (이하 Tom이라 한다)역시 하버드 출신이다. 전문 정치인으로 국무장관을 거친 만큼 대통령을 빼곤 정가 최고의 위치까지 올랐으니 수완이야 두 말할 필요 없다. 180cm에 뱃살이 제법 불룩한 이 아일랜드인은 얼굴 표정만으로는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을 정도의 카멜레온 형으로 상대방에게 속마음을 읽히지 않는다.
로스쿨에서 만난 둘은 서로에게 자기가 갖고 있지 못한 좋은 장점이 상대에는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가깝게 지내왔다. 그만큼 서로의 장단점을 꿰고 있다는 뜻이 된다. 졸업 후 가는 길은 달라 하나는 정계의 거물이 되고 다른 이는 경제계의 큰 보스가 된다.

겨울로 가는 길목이라 어깨를 움츠릴 만큼 한기가 느껴지는 저녁 7시30분 둘은 포토맥 강가 한 아담한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만난다. 별도 칸막이가 있어 둘만이 비밀 얘기를 할 수 있는 조용한 장소다. 흉허물 없이 자주 만나는 사이이기도 하였지만 사업 출장으로 워싱턴에 온 Bob을 Tom이 영접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겉으로 출장을 가장했으나 특별히 중요한 일이 있어 조용히 만나자는 요청을 받은 Bob이 낮의 일을 서둘러 끝내고 저녁시간을 둘이만 갖기로 비워두었다.

수십 년을 만나 서로 너무 잘 알기에 집안일이나 자식들 안부 같은 잡담을 나누고 캘리포니아 산 포도주 '조던' 한 병을 다 비워가며 식사를 끝냈다. 후식으로 초콜릿과 달콤한 포트 한 잔씩 마실 때까지도 별다른 서두를 꺼내지 않는 Tom을 보고 Bob은 아마 '엄청나게 비밀스러운 얘기가 있나보다' 라고 긴장하고 있다. 그게 정치가들의 특성이기도 하고.

"친구, 사실 이 일은 극비로 해 주면 좋겠어. 내가 모시던 상관들이 조용히 제안한 일이라 사실이 알려지면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을 수도 있고."
평소 그답지 않게 서론이 너무 길다. 청치인의 명확 간결한 어법을 구사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것은 그도 이 제안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름 아니라 자네가 사모펀드를 하나 만들어 잘 운영해 주었으면 해. 투자자들은 우리가 확보할 테니 크지도 적지도 않는 규모로 시작하면 좋겠어. 약 1억불에서 2억불 정도로."
"아니, 이 사람아. 그게 뭐가 어렵다고 이렇게 뜸을 드리나? 펀드 하면 우리고 나 또한 그 시장을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는데."
그러나 Bob은 속으로 국무장관의 상관들이면 누구겠는가? 대통령? 또 그와 같은 수준의 사람들 아닌가. 그러면 이들이 과연 돈 몇 푼 벌자고 회장을 부르고 이렇게 전임 국무장관을 심복으로 넣어 심각하게 운을 떼는 걸까?

"짐작하겠지만 투자자는 겉으로 전혀 나타나지 않는 평범한 전문가들 집단일 것이네. 변호사, 의사, 회계사, 변리사 등 하이클래스 집단일 테니까. 실질적인 주인들은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겠지. 그들 영향력이 세계를 움직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무조건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또 그것을 통해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한 나라를 움직이려고 하는 거야. 물론 합법적으로. 정보기관들을 물론 다른 서방국가들의 도움과 별도 팀의 지원도 가능하면 받게 될 터이니 실패란 있을 수 없을 거야. 내 말 뜻 알겠나?"


3.

부실회사 자산가치가 50이라면 보통 100의 채권이 발행된다. 이중 가장 안전한 자산인 시니어 본드는 10정도고 주니어 본드가 20, 50은 위험자산, 20은 정크본드다. 안전과 위험은 반비례하니까 시니어나 주니어는 안전한 대신 이윤이 거의 시장가 이하이고 위험자산과 정크는 높다. 특히 부도위험이 높은 정크는 어지간한 배짱 없이는 투자하기 쉽지 않다.

사모펀드 골리앗은 주로 정크에 집중한다. 그것도 저개발국가에서 발행한 국채이거나 그 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에서 발행한 채권들이다. 물론 그런 채권의 시장가격은 형편없이 낮은 수준이다. 부도 위험이 아주 높고 채권이 휴지조각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에는 만기가 5년 남은 채권가격이 10%대에 머문다. 잘하면 대박이고 못하면 쪽박이다.

그들에게 부도란 있을 수 없다. 다른 채권은 몰라도 골리앗이 보유하는 순간 최악의 경우 그들 소유분 만이라도 어떤 수단을 통해 전액 상환이 된다. 그러니까 5년 만에 최하 투자금액의 7~80% 이상 수익을 올리는 셈이 된다.

만약 갚지 않을 때엔 전 방위 압력이 행사된다. 처음에는 조용하게 기업자체에 한정하여 타이른다. 그래도 귀를 닫으면 해당 정부의 입김을 통해서 종용한다. 지체하거나 불이익을 당할 때에는 여러 가지 루트를 통해 보복조치가 이루어진다. 눈에 보이게 혹은 아무도 모르게. 남미에서는 국가수반까지 경질되게 하고 구속하게 만들어 쓴맛을 보게 한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계의 힘이란 무소불위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일이란 없다. 모든 것은 지나치리만치 철저히 계획된 과정의 일부다. 어디의 어느 나라, 어떤 일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정되고 그렇게 세계는 말없이 굴러가고 있다.

4.

황 사장이 존의 문서를 들고 황급히 김병철 부회장을 찾아간 것은 그가 떠난 뒤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다. 한국경제 GDP의 1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거대한 공룡인 한국기업의 부회장은 회장이 주로 해외출장 중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결정권자다. 김 부회장, 50대 초반 나이에 비해 원숙해 보이는 신중하고 멋진 신사, 영화배우로 내놔도 손색이 없을 만큼 잘 생긴 남자다.

"최후통첩 같습니다."
골리앗의 소문을 들어 잘 알고 있는 그는 뚫어지게 편지만 되풀이해서 읽는다.
"뻔히 소송에서 질 것을 잘 아는 그들이 왜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지?"

골리앗은 최종 결심공판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며 주주가치 보전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일 것을 통보한다는 어쩌면 당연하고 간단한 내용이나 그들이 느끼기엔 선전포고와 같다. 누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겠다거나 어떻게 세를 규합하여 대응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내용이 얼마나 어마무시한지를 동물적인 감각으로 잘 알고 있다.
"제가 골리앗에게는 별도로 손실 보전할 의사표시를 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카드를 쓸지 걱정 됩니다."

김 부회장은 아무 말이 없다. 어릴 때 십여 년을 미국에서 공부한 경험이 있는 그로선 미국 사람들이 편지를 쓸 때 어떤 단어를 선택하는지 그 의미를 조금은 알고 있다. 황 사장이 가지고 온 편지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정중한 표현이지만 하나하나 무서운 내용이란 걸 잘 안다. 그렇지만 이곳은 미국이 아니질 않는가? 재판으로 간다 해도 법률적으로 전혀 하자가 없고 여론도 우리 편이다. 그룹 내 기업들끼리 합병을 하겠다는데 크게 보면 주주변동 그 자체가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시장 소문을 그대로 믿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소위 증권가엔 '찌라시'라는 게 있다. 보통 현실 즉 팩트(fact)보다 좀 과장된 표현이 대부분이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듯이 전혀 근거 없는 소문만은 아니기 때문에 별도 쪽지로 도는데도 투자자들은 그 내용에 집중한다. 이 찌라시에 의하면 벌처(vulture)시장에 무자비한 포식자로 또는 썩은 고기만을 먹는 콘도르로 골리앗을 평가한다. 그네 투자자들은 겉으론 아무 문제없는 평범한 시민들이지만 실제 소유주들은 각국 수반들과 고위직들 그리고 군사와 경제의 큰 손, 더 나아가 유대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세계 지도자들로 불가능이란 없다는 것을 실제 보여주는 그림자 권력이라는 소문이다.
…….
10분 이상 동요 없이 앉은 그대로 침묵하던 부회장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창가로 걸어가 멀거니 창밖을 본다. 거리는 퇴근시간을 맞아선지 극심한 트래픽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맞은편 빌딩 15층 영화관에서는 간판 프로그램으로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4'를 내걸었다. 김 부회장 방과 같은 15층이라 정면으로 잘 보인다. 전혀 불가능한 일을 초인적인 힘으로 사건을 해결해가는 내용에 왜 관객들은 열광할까? 정의롭고 약한 자를 응원하는 보통사람들은 결국엔 정체를 드러내는 무시무시한 공룡에 반기를 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분히 미국적인 초능력자 슈퍼파워 애기다.

"그냥 갑시다. 여긴 대한민국이니까요."
"잘 알겠습니다. 이 편지는 무시하겠습니다."
편지를 탁자에 놓아둔 채 김 부회장 방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황 사장은 뒷주머니로부터 손수건을 꺼내 땀으로 범벅이 된 이마와 얼굴을 닦는다.

5.

콘도르는 날 수 있는 조류 중 가장 큰 새다. 안데스와 캘리포니아 두 종류가 있으나 캘리포니아는 멸종에 가까워 안데스 종이 유일하다. 안데스 산맥을 3m 이상의 큰 날개로 선회하는 그 위용이 대단하다. 몸길이가 1.2~1.3m, 9kg 몸무게를 가진 이 새는 사실 가장 순한 새지만 겉모양은 반대로 무서워 보인다. 살아있는 동물을 사냥할 능력이 없는 이 새는 주로 죽어 썩어가는 사체를 파먹는다. 보이는 것과 실제는 영 딴판이다. 독수리도 하늘의 왕자라는 허울에 맞지 않게 까치와 까마귀들에게 매번 당한다. 독수리도 죽은 고기만 먹는다.

재미있는 것은 독수리나 콘도르를 영어로 똑같이 vulture라고 표현한다. 그러니 벌처펀드는 주로 독수리나 콘도르처럼 죽은 사체와 같은 채권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결국 존이 몸담은 골리앗도 죽은 사체를 파먹고 있는 콘도르와 같다.

고기가 가장 맛있을 때가 언제인줄 아는가? 죽어서 완전히 부패하기 직전이 가장 맛있다고 한다. 비프스테이크는 날고기를 소금, 후추, 마늘, 양파 등으로 밑간을 하고 그늘에 놓아 썩기 전에 불에 구운 것이 최고라고 한다. 그런데 명심해야할 점은 완전히 썩은 것을 먹으면 식중독으로 목숨까지 위태로우나 썩기 직전에 먹으면 최고의 맛을 선사한다니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로 천당과 지옥이 갈라진다.

벌처펀드 역시 이와 유사하다. 구입할 때부터 그 채권은 죽어 부도 확률이 높은 것이기에 극도로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사망 신고를 해버리면 한 푼도 건지지 못하지만 그 전에 회수하게 되면 최고의 수익률을 자랑한다. 그래서 자신 있는 투자자들은 여기에 노름하듯이 All or Nothing에 배팅한다. 그야말로 꾼들이다.


6.

오랜 기간 동안 주장과 반박을 되풀이하다가 대법원까지 가서 '이유 없음'으로 원심파기환송 판결이 내려지자 한국기업은 긴장의 끈을 내려놓는다. 그러나 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날 바로 국내 최대인 국민펀드의 투자팀장을 만난다. 벌써 판결일자에 맞춰서 면담 일정을 잡아놓았다. 강남 부자들이 산다는 G동 빌딩가 한 복판, 역시 20층 건물 5층 창가에서 팀장과 마주한다. 전형적인 월급쟁이 팀장은 소문만 무성한 골리앗의 책임자를 만난다는 것이 영 거슬려 긴장한다. 이 40대 초반, 배가 올챙이 같은 작달만한 사나이는 찜찜하여 땀을 계속 닦아낸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중하고 예의바른 존의 미소에 긴장이 녹아내린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팀장도 깍듯이 인사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팀 자체에서 한국물산 합병에 찬성을 품의하셨나요?"
말문이 막힌다. 그렇다고 하면 회사 손실을 무릅쓰고 한 이유를 그렇지 않다고 하면 윗선을 대야 하는 진퇴양난의 질문이다.
"본부장님과 팀원들 모두 상의해서 내린 결정입니다."

한참 뜸을 들이다가 어렵사리 내린 대답이다. 그러나 그도 어정쩡한 것이 그러면 책임을 본부장한테 넘긴 꼴밖에 더 되겠는가. 이 회사는 명확한 주주가 없기 때문에 직원 90%가 알음알음 들어온다. 뒷배 없이는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다. 만약 본부장한테 찍히면 그걸로 끝이다. 찜찜하긴 마찬가지다.
"알겠습니다. 후일 많은 협조를 바랍니다."

불과 10분도 안돼서 존은 휑하니 가버렸다. 존이 간 뒤에 팀장은 밑을 닦지 않은 사람마냥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라 책상에 앉지 못하고 창가를 서성거린다.
그 이튿날 존은 국민펀드 상무 즉 본부장을 만난다.

낙하산 인사들의 특징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말꼬리를 흘리며 슬그머니 책임을 떠넘기려고 애를 쓴다는 공통점이 있다. 똑같은 질문에 아니나 다를까 윗선으로 핑퐁을 친다. 결국 사장이다. 그럴 것을 예상하고 존은 밑밥을 다 깔아놓고 사장을 옭아맬 궁리를 한 것이다. 그야말로 사장은 자기 목이 정부의 손에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존은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투우사가 마지막 창으로 숨통을 찍을 때는 침착해야만 한 번에 성공할 수 있는 것처럼 우왕좌왕 서두르다간 도리어 황소 뿔에 받히어 상처를 입거나 죽기 쉽다. 서서히 몰이하듯 몰고 온 마지막에 사장을 만난다. 그 사이 부하들이 여러 가지 변명으로 사장에게 보고하였겠지만 자기 선에서 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부관련 회사 인사들의 특성이 그렇다. 누가 나가면 뒤돌아보지 않고 새로운 인사에 집착하는 경향이다.

"한국물산 합병이 손실인데 찬성하신 것은 정부 협조사항인가요?" 한 칼에 목을 베듯 묻는다. 사장은 이렇게 세게 나올 줄 모르고 무방비로 대하다가 찔끔한다. 좋은 게 다 좋다고 어우렁더우렁 협조하며 법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허허하며 살아온 그에겐 예리한 송곳이 뜻밖이다. 작달막하고 호리호리한 60대 이 사나이는 자기한테 이렇게 대하는 사람이 처음이다. 특히 아버지뻘 되는 사람 앞에서.
"무슨 그리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손실을 떠나 향후 회사가 합병을 발판으로 성장하면 이익을 충당할 수 있고 긍정적이라 생각해서 이사회에서 통과된 사항에 왜 토를 다십니까?"

그래도 사장이다. 다른 해바라기들 보다 더 적극적으로 자기 방어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여기서 물러서면 끝장이다.
"청와대 경제 수석과 지난 9월 20일 통화한 내역과 만난 날짜, 장소까지 다 파악하고 왔으니 다른 변명일랑 하지 마십시오. 정확한 데이터와 정보 없이 어떤 토도 달지 않는다는 걸 잘 아실 텐데요."

말문을 닫는다. 상대는 벌써 그 내용을 다 알고 왔다.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로 벌레가 기어가는 것까지, 모기 우는 소리까지 다 파악하고 있다지 않는가. 괜히 왈가왈부해봐야 구차한 변명밖에 더 되겠는가. 그러나 너무하다. 왜 우리가 타깃인가? 끙~ 하며 한참을 멍하니 존을 쳐다보던 사장은 침묵을 깨고 입을 연다.
"경제수석의 지시사항이라……."

7.

김정치 대통령과 안수재 민정수석은 중고등학교 동창이다. 김은 고등학교 성적이 시원치 않아 K대를, 안은 S대 법대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안이 3학년 때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일찌감치 모두의 부러움을 받는 판사의 길로 들어선다. 김은 대학교 사학과 2학년부터 학생운동을 하고 데모대를 지휘하는 등 남다른 리더십을 보이는 반면 출석수에 급급하며 경찰에 좇기면서도 겨우겨우 졸업을 함과 동시에 어떻게 줄을 대어 국회위원 보좌관에 들어간다.

둘은 서로 다른 분야에 일했으나 짬짬이 만났고 서로 울분을 토하며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사람의 일이란 정말 알 수 없는 것, 인생 또한 역전의 역전을 거듭하며 엎치락뒤치락하다 김은 대통령에 당선되고 안은 대통령의 민정수석으로 들어가 친구 겸 가장 믿을 수 있는 최측근이 된다.

김이 젊은 기수로 한창 발돋움할 때 잘나가는 유명한 원로 정치가가 특별히 그를 후계자로 삼고 외동딸을 소개하여 현재 영부인인 그녀와 어쩔 수없이 결혼을 했다. 아들, 딸 하나씩 낳고 그야말로 모범적인 남편 아내로 지내왔다. 대통령에 당선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준수한 외모에 가장 가정적이란 이미지와 장인의 영향력이 정가를 지배하여 그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런 그에게는 말 못할 고민이 하나 있다. 대학교 1학년 때 학과 미팅으로 만나서 깊이 사귀어온 미모의 애인이 있고 동거할 정도로 서로 사랑하는 사이었다. 김이 정치적 도약을 위해 정략결혼을 할 때 울고불고 난리였지만 너무 순진하여 한 남자밖에 모르는 전형적인 옛 여성상이다. 그래도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딸을 하나 낳아 몰래 기르다가 그 애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미국 LA로 훌쩍 떠난다. 아니 떠났다기보다 김이 주선하여 보낸 것이다. 철저한 이중생활이다.

문제는 돈이다. 아이가 커가면서 교육비, 생활비 등 지출은 점점 늘어나는데 김이 일정액을 보내고 여자가 일을 하며 보태도 모자랐다. 김은 벌써 젊은 기수, 정당에 촉망받는 차세대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던 때라 어찌어찌 한국물산과 연결되어서 친한 조카 일이라고 둘러대며 몇 차례 신세를 지게 된다. 눈치 빠르기로 유명한 기업에서 절대 비밀을 보장하고 누구냐고 묻지도 않은 채 현지지사나 무역거래 등을 통하는 방법으로 김을 돕는다. 소위 보험에 드는 것이다. 기업에선 아주 적은 투자에 불과하지만 김으로서는 엄청난 짐을 덜어준 고마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서로 발설하지 않으면 무덤까지 가도 아무도 모를 비밀이니까.

갑자기 큰돈이 필요하게 되었다. 10년 넘게 살고 있는 미국 집의 보증금이 오르기도 하였지만 외롭게 자라는 딸이 심장판막이상으로 수술밖에 방법이 없을 정도로 위급을 다투게 되었기 때문이다. 백방으로 돈을 주선해 보았지만 큰돈을 마련하기 어려워 부득이 김에게 연락했다. 갑자기 SOS를 받은 김은 급하게 돈을 보낼 방법이 없고 어디서 수 천 만원을 아내 몰래 구하기도 힘들어 전전긍긍하다 한국물산 사장을 만나 집안 조카가 위독하여 병원비 때문이라 둘러대고 사정 얘기를 하자 두말없이 해결해준다. 그 후부터 기업에 대해 고마워하며 믿고 의지하게 되었다.

그런 저런 연유로 김 대통령은 한국물산 합병에 도움을 주는데 아무도 모르게 가장 신뢰하는 자물통 민정수석을 통해 언질을 주었고 그것이 경제수석에게 메모가 되어 국민 펀드에 전화를 넣은 사실이야말로 그야말로 극비 중 극비인데 이것을 어떻게 벌처펀드 골리앗이 깡그리 질서정연하게 정리하여 파악하고 있었을까?

8.

먼저 검찰에 소환된 것은 국민펀드 팀장, 본부장 그리고 한국물산 황 사장이다. 심문이라기보다 명확하게 일자, 시간까지 나열된 정보 내용을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했다. 그만큼 서방 정보기술은 세계 최고다. 한 치 오차도 없이 숨소리까지 잡아내 두 손을 들게 한다.

다음이 한국그룹 김 부회장과 국민펀드 사장이다. 꼼작 못하게 옭아매는데 성공한다. 황 사장과 김 부회장에겐 다른 혐의가 더 얹힌다. 달러 불법송금과 뇌물죄 적용이 그것이다. 지난 10여 년간 수십에서 수백만 불을 빼돌리는 불법 외화유출에 뇌물을 지속적으로 공여했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무역거래이고 인보이스와 선하증권 등 거래 증거 자료들을 제출했지만 이번에는 미국 감독기관에서 확인한 금융거래 내역까지 증거자료로 제출하는 바람에 어떻게 해볼 도리 없이 위증죄까지 쓰게 되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도 상황을 돌리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고 명명백백한 증거 앞에 누구도 잡아떼기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검찰에만 그런 자료를 건넸으면 아마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합의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 2년간 한국물산과 국민펀드 그리고 경제수석까지 무슨 벌레 본 것처럼 피하고 무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려고 존은 필요 이상의 정보를 흘려 걷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냉정을 무기로 하는 골리앗의 평소 방식과는 분명히 다른 감정적 대응이다. 그로 인해 권력 주변에 기대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던 궤적에 제동이 걸려 덜커덕거리기 시작한다. 회사 목표와는 분명히 벗어난 한풀이 칼질처럼 섬뜩하리만치 마구잡이다. 그래서 한번 걸리면 꼼짝달싹 못하고 그대로 구속되어 법의 심판을 기다리는 신세들이 된다. 어쩌다 빠져나가려하면 또 다른 대응으로 옭아매고 존은 급기야 신문방송 매체에까지 슬쩍 흘리기 시작한다.

언론의 속성이 있다. 언론은 독자들을 상대로 생명력을 유지하는 만큼 그네들이 보는 가장 큰 이슈는 남녀 불륜이다. 아니 불륜이 아니라 결혼 전에 아이를 가졌으니 사기결혼과 같은 것이다. 남녀 관계, 사기 결혼, 딸의 건강과 미모, 첫 번째 부인 현황 등이 돈 문제에 앞서 너도나도 앞 다퉈 보도한다. 그것도 한 나라를 통치하는 대통령의 숨겨진 비밀이니 한 줄짜리 사실을 2~3페이지 분량으로 부풀러 각종 이야기들을 만들고 편집하여 보도한다.

게다가 세계적 기업이 연관되어 그들을 다 한통속으로 몰아친다. 언론은 지나치리만치 숨 쉬는 것까지 까발린 비판기사에 집중한다. 같은 사건이라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결론은 엄청나게 달라지고 영향은 180도로 뒤바뀐다. 이제까지 보수 편에 서있던 언론들 모두 등을 돌리는 꼴이 되고 그것은 요원의 불길처럼 걷잡을 수 없게 국민들 성향을 바꾸게끔 충분히 설득을 거듭한다. 원인은 오직 소통 부재와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여유 없는 답답한 정치력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결론은 지은 죄 보다 백 배 천 배 더 부풀려져서 국민들을 호도하게 된 것이다. 단초는 미국기관의 정보에서 발단이 되었지만 그것으로 한풀이하듯 나선 것은 언론이고 그 여파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한 나라가 뒤집어지게까지 된다.

언론을 등에 업기 시작한 진보 입장에서는 탄탄대로다. 무슨 말을 해도 그런 거구나 하고 언론이 같이 맞장구를 치며 심하게 몰아붙이는 형상이다. 신흥권력 노조를 앞세운 좌익단체는 제 세상을 만났다. 보수정권과 재벌이 짜고 저지른 일들이 백일하에 들어났으니 이보다 더 좋은 먹잇감이 어디 있겠는가. '사실을 밝혀라, 밝혀라.' 12개 마이크를 광화문 네거리에 달고 해치광장 한복판에서 하늘이 떠나가도록 소리친다. 곡비들은 울고 상제들은 굴건제복으로 땅을 친다. 해가 지자, 하나 둘 촛불을 켠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고 급기야 수십만 인파가 되어 전국으로 훨훨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번져 나간다. 시끄러워야 살맛이 나는 사람들이다. 싸워야 하고 왕왕대야 실적이 늘어난다. 이젠 누가 어떻게 마구 떠들어도 제지할 세력이 아무도 없다.

보수의 철저한 몰락은 골리앗은 물론이고 미국이 지향해온 국가 이익에도 막대한 손해를 끼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9.

존은 회장과 마주앉았다. 몇 십 분 어색하나 무서운 침묵이 가슴을 타게 한다.
"너무 멀리 가버렸어, 대통령이 버팅기다 우리에게 SOS를 치게끔 만들어야 했던 거야. 그럼 못 이긴 척 하고 그를 방어해주고 우린 타산 분기점에 다다를 때 손 털고 빠져나와야 하는 거야. 그런데 이게 뭔가? 파르티잔들이 날 뛰게 만들어 우리 스스로 함정에 빠져버린 게 아닌가. 그들이 누군가? 절대 우리 편이 될 수가 없네. 사사건건 우리에게 시비를 걸 걸세. 반미운동이 일어나고 중국과 손을 잡을지언정 우리를 배척할 거야. 우리가 진 거지. 자네의 그 알량한 자존심이 만들어낸 결과라네. 우린 장사꾼이야. 설령 썩은 고기로 배를 채울지언정 명줄을 뜯지는 말아야지. 무엇 때문인가? 우리에겐 연습 게임이 없다네. 지시에 어떤 반항도 부차적인 설명도 요구할 수 없음을 자네가 더 잘 알 테지? 정치를 이용할 수는 있어도 그 흐름을 바꾸거나 관여하지는 말아야 하네. 남미에서 부득이 이익을 위해서 몇 번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으나 그건 어쩔 수 없는 차선책이었고 결과도 우리 손에서 벗어나지 않았잖아. 이번에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 얼마든지 그러지 않아도 되고 또 현 정권이 우리에게 너무도 잘 협조해 주는 사람들이란 걸 몰랐다고 하지 않겠지? 문제는 동양의 주요한 우방 하나를 잃어버리게 되고 그것이 도미노가 되어 아시아 전체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데 있어."

맨해튼을 벗어나 다리 건너 뉴저지 허드슨 북쪽을 향해 달리던 존은 강가에 차를 세우고 강물을 뚫어지게 본다. 저 멀리 빌딩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는 맨해튼 섬의 흉물스런 모습에 갑자기 욕지기를 한다. 세계를 움직이고 명줄을 꽉 잡고 있는 거대한 괴물들 손아귀에 휘청거리는 지구라는 별이 오늘은 또 어디로 흘러갈까? 라이터는 항시 지니고 다녀도 그 불길을 당기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에서 왜 휘청거렸을까? 무엇이 그를 못 견디게 정신 놓게 만들었을까? 두려워하나 냉소하는 한국인들 표정이 섬뜩하리만치 싫어서? 사자 근성으로 한번 목을 물었으면 숨통을 끊어놔야 한다는 승부욕이? 고개를 돌린다.

끝없이 불의 고리로 촘촘히 연결된 뫼비우스의 띠가 몸서리쳐지게 싫었던 거야. 한번 쯤 그걸 과감히 잘라내는 영웅이 되고 싶었어. 그런데 그 자르는 칼은 어디서 나왔을까? 그것 역시 세계를 아우르는 거대한 뫼비우스 띠의 일부에 불과하고 나는 그 꼭두각시 중 하나일 뿐인데.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단지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손으로 옮겨지는 것일 뿐인데.

그 후 누구도 존을 본 사람이 없다. 뉴욕에도 그리고 한국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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