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준, 버티고 마침내 승리하다

최영준, 사진제공=tvN

"4개의 작품을 동시에 하기도 했다. 혼동이 올만큼 분량은 크지 않았다. 아침에 신촌에 있다가 일산으로 갔다. (작품에 맞춰) 가르마를 계속 바꿨다."


배우 최영준이 지난해 말 MBC '라디오스타'에 나와서 한 말이다. 그의 말마따나 요즘 TV 채널을 무심코 돌리다보면 심심찮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tvN 토일극 '우리들의 블루스'에선 순박한 제주 얼음 장수 호식으로, SBS 금토극 '왜 오수재인가'에선 이지적 분위기의 사모펀드 대표 윤세필로 출연 중이다. 지난달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안나라수마나라'에선 형사로도 나온다.



그 중에서도 가장 활약이 돋보이는 건 '우리들의 블루스'에서다. 제주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그는 시장에서 얼음을 파는 제주 토박이 호식이로 나온다. 한때 도박에 빠져 밑바닥 인생을 살다가, 아내가 야반도주해 홀로 딸을 키우게 되면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인물이다. 개과천선한 호식이는 참 열심히도 산다. 딸을 의대에 보내겠다는 집녑 하에 새벽 같이 일어나 밥상을 차려주고 자신도 일찌감치 일을 나간다. 그렇게 극진하게 키운 딸 영주(노윤서)는 전교 1등에 반장까지 하는 모범생으로 자란다. 하지만 자식 농사만큼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을까. 영주가 원수처럼 지내는 동창 인권(박지환)의 아들 현이(배현성)와 덜컥 사고를 치고 만다.


호식은 영주를 나무라는 대신 자신의 뺨을 내려친다. 그리고 끝내 아이를 낳겠다는 딸에게 져준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을 참 애틋하게 보여주는 캐릭터다. 호식이라는 이름이 퍽 어울리는 이 인물의 말과 행동은 참 정감있게 주변의 공기를 감싼다. 책임지지 않고 살았던 시절에 회개하듯 의무감이 짙게 서린 아버지의 얼굴을 보여준다. 딸 아이의 오랜 산통에 마치 아이처럼 우는 장면이 나왔을 때는 아버지의 귀하고도 순수한 마음이 웃기면서 동시에 애틋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최영준, 사진제공=tvN

tvN '빈센조'의 영운이나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광현으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을 때도, 최영준은 짧은 분량에도 친근한 얼굴을 근사하게 완성할 줄 알았다. 광현이 '슬기로운 의사생활' 의대 동기 중 홀로 구구즈에 속하지 못했을 때도, 그에게 가련한 마음을 품어 응원하게끔 만들 정도였다. 그렇게 그는 주인공이 아닌 캐릭터들에 이해와 이입을 곧잘 유도해냈다. 순간의 집중력이 강하며, 결코 카메라 앞의 작은 기회조차 놓치지 않는다. 그것도 홀로 튀기 위해 과하거나 넘치지 않고 사냥감을 낚아채기 위해 차분히 때를 기다리는 맹수의 모습으로 말이다.


이러한 연기 방식은 최영준이 지금의 자리에 온 과정과도 비슷하다. 버티고 때를 기다리는 것. 그가 배우로서 두각을 드러낸 지는 불과 2년 남짓이지만, 연예계에 데뷔한 건 벌써 20년이 넘었다. 2002년 하동균, 이정 등과 함께 보컬 그룹 세븐데이즈로 데뷔했던 그는 Y.J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성적 부진으로 그룹이 해체한 후에 나머지 멤버들이 새로 꾸린 그룹 원티드에 찾아든 갑작스러운 비보는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줬다. 서재호의 안타까운 사고. 최영준은 '라디오스타'에서 "원래는 장난이 심했고 활발했다. 재호가 자기가 쓸 시간을 주고 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최영준은 작은 공연부터 시작해 정말로 악착같이 버텼고, 떠난 줄 알았던 기회를 움켜잡았다. 지금은 대작에도 척척 캐스팅될 만큼 제작사에서 믿고 찾는 배우가 됐다. 그리고 이 순간 그는 첫 주연 타이틀을 단 호식 역으로 가장 적극적인 폼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먼발치에서 친구의 썰을 풀거나, 주인공 주변 인물에 그쳤던 과거를 지나 그는 자신을 더 적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계기에 마땅한 연기로 화답하고 있다. 연예계에서 악착같이 버텨도 살아남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는 끝까지 쫓아가 성공을 잡아내기도 한다. 최영준이 수많은 단역을 지나 호식이에게 도달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