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카테린부르크, 어느 벌목공의 이야기

장마가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큰 빗살은 내리지 않는 것 같다. 전 국민이 목말라하고 전 국토의 땅과 나무들이 한 낮의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한없이 목말라 하는데 비가 내리기 보다는 하늘이 유난히 푸르고 맑다. 뭉게구름은 이런 하늘에 화가처럼 그림을 그리고 달아나 버린다.

산에 나무들이 많으면 가뭄과 홍수를 이겨낼 수 있다는 교과서의 가르침으로 무장된 필자가 러시아에 갔을 때 첫 번째 놀란 것은 나무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모스크바에는 산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시내 어디에나, 공원 어디에나, 가로수길 어디에나 아름드리나무들이 병렬하고 있었으며 교외로 나가는 길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평선 끝까지 베료스카들이 솟구치고 있었으며 기차를 타고 다른 지방을 갈 때는 광활한 벌판이 계속되거나 숲이 계속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필자는 이렇게 많은 나무들을 보고 참으로 부러워했다. 자연의 풍성함과 많음은 왠지 기분 좋은 부자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러시아란 나라는 나무만 팔아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우리나라에도 나무가 많다고 하지만 러시아를 여행해 본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이 나라의 나무 많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러시아에는 북한을 비롯해 다른 나라에서 온 벌목공들이 일하고 있는 지역이 있는 것으로 일려져 있다. 필자는 그런 장소에는 직접 가보지 않았지만 러시아에 살 동안 가까이 지냈던 북한 출신의 재러 시인 리진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분은 함흥에서 태어나고 김일성 대학에다니던 중, 6.25 참전을 하게 되었는데 정부의 발탁으로 러시아에 유학을 오게 된다. 대부분 북한 고위 층 자녀들이 러시아에 유학을 오지만 워낙 출중한 성적으로 기록되어 일반인으로는 처음으로 유학을 오게 된 케이스다.

유학을 오고 일 년 뒤부터 그 분은 북한의 공산주의가 얼마나 왜곡되고 잘못되었는지 간파하고 (이미 전쟁 중에 북한이 거짓으로 인민들에게 선동하고 잘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곧바로 김일성 항명운동을 전개하고 러시아에 망명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러시아 국적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본인은 언제든지 다시 조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국어로 시 쓰는 작업을 그치지 않았으며 북한을 향해 우회적인 방법으로 은유적인 표현을 통해 끊임없이 그들의 억압성과 허튼 망상을 고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가 한국과 수교를 하게 되고 이제까지 금단의 땅이었고 동토의 땅으로 한국 문인들이 1992년 여름에 한민족 뿌리 찾기 세미나를 갖게 되면서 이 분을 재조명하게 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이 시인은 한국과 활발하게 교류하게 되고 한국 문단에서는 몇 번이나 이 시인을 초청하곤 했다. 필자가 이 분을 알게 된 것은 1992년 한국문인협회 주최 러시아 세미나에 참석 하면서였다. 그리고 그 해 9월부터 본격적으로 모스크바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오랜 인연이기도 했다. 그 분의 박학함 에는 늘 전문성과 깊이와 논리로 무장되어 있어 타인으로부터 어떠한 공격에도 끄덕하지 않았고 논쟁에는 한 번도 져 본 일이 없다고 했다.

여름이면 이 시인은 항상 복숭아를 사가지고 오셔서 음악과 문학이야기를 늦은 시간까지 들려주시면서 담배를 즐겨 피셨는데 담배 피는 목에는 복숭이가 제일 좋다고 하시면서 복숭아를 즐겨 드셨다.

그러던 어느 하루,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고향인 함흥에서 자랄 때는 명란 젓을 바께스에 퍼 날랐고 가재미 식혜를 즐겨 먹었던 추억들을 이야기 하시면서 갑자기 목소리가 잠기셨다. 이유는 자기가 러시아에 망명 한 후, 함흥에 남아있던 식구들이 모진 핍박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괴로워하였는데 뜻밖에도 편지를 받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동생이 북한 벌목공으로 에카테린부르크 어느 숲에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자신을 보러 올 수 있냐는 전갈이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듣고 까무라치게 놀랐고 반가워서 눈물을 흘렸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바로 아르바이트 해서 모은 전 재산을 다 가지고 다시 한 번 목숨을 걸고 혼자 에카테린부르크의 주소를 찾아갔다고 하셨다. 기차를 타고 걷고를 반복하는 척박한 상황에서도 동생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행복했으며 벌목장에 도착해서 또 누군가의 도움으로 동생을 불러내 영화에서나 본 것 같이 두 손을 마주 잡고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고 하셨다. 물론 집안 이야기도 들었을 것이지만 오직 친 동생 얼굴을 살아생전에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절실하고 중요해서 얼굴만 맞대고 있었다고 하셨다.

러시아에 망명한 북한 시인과 그의 동생 벌목공의 이야기는 한국 현대사의 불행했고 비극적인 한 궤적을 단면적으로 보여 준 것이었다. 필자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소름이 끼쳤고 그 시대 상황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그리고 그 분의 마지막 말은 “그리고 그게 끝 이었어......벌써 20년도 지난 일이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