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고은 "나라가 있어 조국이라 하고 말이 있어 모국어라 한다"

대한민국 마지막 남은 지성(知性) 시인 고은이 ‘2016년 재외한국어교육자 국제학술대회’ 기조 강연자로 나서 한국어 사랑을 설파했다. 시인 고은이 고령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정정한 모습으로 강단에 올라선 것은 26일 오전 9시. 현재까지도 젊은 작가들 못지않게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청춘 시인’답게 그의 목소리는 카랑카랑 그 자체였다.

“별을 본다. 발밑의 현실로부터 자못 우주에의 감회가 일어난다. 우주는 백수십억 년 전에 탄생한 이래 아직껏 팽창 중이라 한다. 우주 속의 지극히 작은 별의 하나인 태양은 몇십억 년 전에 태어나 장차 백억 년 뒤에는 그 일생을 마치리라 한다.”


마치 시 한수를 읽어 내려가듯이 읊조리는 단어 하나하나가 공간의 메우기 시작하자 100여명의 강연자들은 숨을 죽이고 다음 글귀에 귀를 쫑긋 기울이며 빠져들었다.

“태양계의 혹성 지구는 어쩌자고 생명의 별이다. 약 삼십오억 년 전부터 이 별에 생명체가 태어나 지금도 생명의 진화가 계속되고 있다. 이 하염없는 우주 운행의 긴 과정에서 이미 사라져버린 생명종은 현존하는 것의 몇백 배가 될 것이다. 이런 우주의 한 시점에서 인간의 언어도 인간과 함께 태어난 것을 ‘언어자연설’은 말한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

지구에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태어나면서 이미 언어라는 것도 함께 존재하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고은은 이것을 ‘언어자연설’이라고 주장했다. 그 증거로 “누가 언어를 인류의 기억이라 했던가. 지금 지구상에는 언어 4000여종이 있고 지방어까지 6570여종이 된다. 100년 전만 해도 세계 각처에서 사라질 줄 모르고 들리던 언어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태초부터 인간과 함께한 언어의 존재를 좀 더 과학적으로 분석하려 했던 고은은 백과사전을 외우기라도 한 듯이 과학적 설명들을 나열해 나갔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언어는 250종이나 되는데 지금은 거의 다 없어졌다. 오스트레일리아 아래 섬의 태즈메이니아어는 백인의 상륙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인도 대륙에는 인도어가 없는 대신 힌디어 등 15개 공용어를 비롯해 1650여종의 언어가 아직도 살아 있다. 파푸아뉴기니는 원주민 4000명이 869종의 언어를 사용한다. 험한 산세로 인한 고산지대 8km를 지나면 언어가 달라지므로 통역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 비하면 한국의 팔도 사투리나 제주도 방언은 귀를 가다듬을 정도밖에 안 된다”

자연스럽게 한글의 얘기를 꺼내든 그는 ‘한글 예찬론’을 펼치며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을 이어 나갔다.

“한글은 남과 북, 그리고 570만 해외동포 사회까지 아울러 7500만 이상의 인구가 사용하고 있다. 이는 세계의 화자 인구 상위권 15개어 중 12위에 자리 잡는다. 북경어, 영어, 스페인어, 힌디어, 포르투갈어, 러시아어, 일본어 등 억대 단위 다음으로 독일어, 오어(吳語), 한국어, 프랑스어, 베트남어 순으로 이어진다. 한글은 언어 사용 인구로 보아도 세계적이다”

특히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한 그는 언어학자들의 예언을 거론하며 “앞으로 100년 이내에 세계의 언어 절반 내지 90%가 사라질 것”이라며 “아니 지금도 15일마다 세계의 언어 하나씩 영어의 지배와 그 밖의 이유로 없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그렇다면 세계 4대 호수의 하나인 아랄 해가 10년 뒤 영구히 자취가 없어진다는 예측은 우즈베크어의 위기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일까. 지금까지 없어진 ‘적도 일대’의 언어들이 그곳의 생태계 생명종의 멸종과 정비례하고 있는 사실은 무섭다”면서 “어떤 작가는 머지않아 중국어, 영어, 스페인어, 그리고 이슬람의 아랍어 이외의 언어는 사어(死語)가 될 것을 슬퍼하고 있다. 이런 비관들은 지금껏 갖은 수난을 이겨낸 현대 한국어의 내일에도 얼비치는 바 있다”며 묘한 여운을 남겼다.

하지만 고은은 한글이 앞으로도 지구상에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과학적 이유들을 설명하면서 한글의 우수성과 한국인의 영특함을 칭찬했다.

“한국어는 고대 신라어, 중세어, 근세 국어를 거치는 동안 풍부하게 변화하고 발전해왔다. 특히 조선 초기 한글 창제와 함께 한자 언어 체계와는 다른 음소를 창조함으로써 오랜 민중생활어를 통한 언문일치 문자의 완벽성이 끼친 영향은 크다. 정인지가 말한 대로 ‘바른 소리正音’로서의 문자언어로 하여금 바람 소리와 닭 울음소리나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나타내는 언어가 된 것이고 H. G. 웰스가 격찬한 문자언어가 된 것이다”

아울러 그는 “언어는 인간정신의 핵심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 의미와 문화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언어는 혼의 기호이다. 만약 어느 민족에게 그들의 언어가 없다면 그들이 쌓아온 모든 가치의 상실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면서 “오랫동안 중국 문자언어의 압도적인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언어를 존속시키며 자신의 문자언어인 ‘나라말쌈’을 만들어낸 이래 한국어는 근대국가로 계승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나라가 있어 조국이라 하고 말이 있어 모국어라 한다.”며 곧 한글이 조국임을 강조한 그는 일제 강점기 말살될 뻔했던 한글이 우리 민족 사이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기에 한민족이 말살되지 않은 것을 고마워했다.

“나는 식민지 후기 국민학교 1학년 수업부터 조선어 시간이 폐지된 첫해의 아동이었다. 일본어를 국어라는 이름으로 배웠고 교과과정 전체의 ‘국어상용國語常用’을 강요당했다. 이것은 나라의 주권을 빼앗고 민족의 주체성을 제거하는 통치에도 불구하고 언어라는 서술 주체 행위가 남아 있는 한 조선민족이 궁극적으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제의 최후 수단이었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한국어를 없애고 한국인의 성명을 없앤 것이다. 이때 일본 이름을 솔선해서 자작한 이광수는 기뻐하며 조선인의 이마를 바늘로 찔러 일본인의 피가 나와야 한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한편 고은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문학과 모국어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는데 나머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모국어의 공간에서 모국어의 시간을 찾아내는 언어 행위가 아닌가. 단테가 라틴어를 거부하고 토스카나어로 『신곡』을 씀으로써 근대 이탈리아어를 세계 수준으로 만들었고 셰익스피어가 영어를, 괴테가 독일어를, 푸시킨이 러시아어를 한층 승화시켰으며 현대 중국의 백화운동(白話運動)과 한국 신문학의 언문일치 운동이 놀라운 업적을 이뤘음을 확인할 때 그 모국어의 힘이야말로 민족 혹은 인간의 자아 완성을 가능케 한 사실을 알게 된다. 비록 한자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언어를 통해서 당송의 시로부터 해방된 허균이나 나는 조선인이므로 조선시를 쓰겠노라던 정약용, 한글시를 남긴 정철과 윤선도는 고대 시가의 위대성을 상속한 모국어의 영광“이라고 설명했다.

시인 고은은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추진하고 있는 일들을 설명하며 기조 강연의 대미를 장식했다.

“최근 나는 모국어사전 남북공통편찬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과도 합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사전의 정서법, 두운법칙이나 어휘 등의 문제도 난관일 것이다. 나는 지난날 옥방에서 국어사전의 낱말을 다 외운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모국어의 낱말 하나하나가 나의 운명을 이루고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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