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달이 가른 한진해운·현대상선의 엇갈린 운명

조건부 자율협약(채권은행 공동관리)을 추진하던 국내 1위, 2위 해운사의 운명이 엇갈렸다. 한진해운 (12원 ▼26 -68.4%)이 지난 25일 별다른 진전 없는 자구안을 내며 법정관리(기업회생) 신청을 목전에 둔 반면 현대상선은 채권단 관리를 받으며 재기의 기회를 얻었다.

올초만 해도 한진해운의 상황은 현대상선에 대한 우려에 가려져 있었다. 당시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의 부채비율은 각각 2000%와 848%였다. 부채비율이 2000%에 달하는 현대상선은 한진해운보다 2개월여 먼저 자구노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 두 달 앞선 판단이 반년이 지난 지금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의 엇갈린 운명으로 귀결됐다.


◇한발 늦은 한진해운…결국 법정관리 임박=한진해운은 시작이 늦었다. 현대상선은 자율협약 개시 한달 전인 지난 2월말부터 용선료 인하 협상에 나섰다. 지난해 말부터 주채권은행인 KDB산업은행과 함께 강도높은 자구안 수립을 고민해온 결과다. 반면 한진해운은 용선료 협상을 자율협약이 개시된 지난 5월 초에야 시작했다. 한진해운은 자율협약 개시 당시 용선료 인하 협상 계획이 미진해 산업은행이 자율협약 신청을 재요청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채권단 안팎에선 "한진해운이 현대상선에 비해 자구노력 의지가 미진하다"는 평가가 흘러 나왔다.

한진해운은 유동성 확보를 위해 팔 자산도 없었다. 영국 런던 사옥 매각 등으로 약 4100억원을 확보하겠다는 계획은 내놨지만 실행된 자구안은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한진해운은 저운임으로 영업 악화가 계속되면서 2분기 중 영업적자가 커졌다. 최근 추산한 내년까지 부족자금은 1조~1조3000억원으로 불어났다.

한진해운의 선박금융 비중이 현대상선보다 높았던 점도 구조조정 추진에 발목을 잡았다. 선박금융은 선박을 담보로 잡고 있어 채권자 입장에선 채무재조정을 해줄 이유가 없다. 특히 외국계 금융사 입장에선 더 그렇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 모두 비협약채권(공모·사모사채와 선박금융) 비중은 70%로 유사했다. 하지만 한진해운의 외국계 선박금융은 1조5000억원으로 현대상선 7000억원의 2배 이상이었다.


◇현대證 매각불발 전화위복..한발 앞섰던 현대상선=현대상선에 대한 우려는 지난해 10월 현대증권 매각이 우선협상대상자 오릭스PE의 중도 포기로 무산되면서 급격히 고조됐다. 역설적이지만 이 때 위기가 부각된 게 결과적으로 현대상선을 살렸다. 현대증권 매각 불발로 재무구조개선약정을 맺고 있던 산업은행이 ‘근본적인 자구안 제출’을 강도 높게 압박해 현대그룹이 ‘너무 늦지 않은’ 시기에 자구노력에 착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산업은행이 ‘근본적인’ 자구안을 요구했던 것은 현대상선의 영업력이 일시적인 유동성 수혈이나 부분적인 자산매각으로 회복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현대상선은 호황기 때 맺은 고액의 용선료 부담으로 반복적으로 적자를 냈다. 은행들이 지원해도 용선료가 그대로 유지되면 밑 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해운사들이 은행의 경영 간섭을 덜 받겠다는 의도로 2000년대 이후 은행 빚 대신 회사채 비중을 늘려와 은행 지원 중심의 기존 구조조정도 진행하기 어려웠다.

결국 산업은행과 현대그룹은 지난 2월에 현대상선을 살리기 위한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조건부 자율협약’이라는 초유의 모델이다. 일반적인 워크아웃이나 자율협약에선 은행만 채무재조정에 나서지만 해운업의 특수성을 감안해 은행, 사채권자, 용선주 모두 채무재조정을 추진한다는 계획이었다. 컨테이너선사인 현대상선에 법정관리는 사실상 ‘청산’을 의미했기 때문에 현대상선을 살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유동성은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는 원칙도 지켰다. 다행히 다시 매물로 내놓은 현대증권을 KB금융이 예상보다 높은 가격인 1조2000억원에 사가면서 자금에 숨통이 트였다. 일촉즉발이었던 용선료 협상도 3개월에 걸쳐 마무리했다. 한진해운이 현대상선의 해운동맹(디얼라이언스) 가입을 동의하지 않아 한때 위기감이 고조되기도 했으나 다른 해운동맹인 2M에 가입해 마지막 숙제도 풀었다. 이달초 채권단이 출자전환하면서 현대상선은 현대그룹에서 분리돼 나왔고 부채비율도 200%대로 개선됐다. 현대상선은 은행의 신규자금 지원 없이 재무구조개선을 이룬 구조조정 사상 유례 없는 사례로 이름을 남기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