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훈의 스테레오마인드]엄마 생일에 부르는 엇노리

엄마는 또 전화를 안 받는다. 생신이라 같이 밥이라도 먹으려고 전화를 했는데 언제나 그렇듯 엄마에게 전화는 책임감이나 의무감을 느껴야하는 물건이 아니다. 그러시겠지.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걱정을 하고 애가 타는 건 엄마가 아니라 자식들이니까.

요 몇 년 사이에 부쩍 마르고, 자주 깜빡깜빡하는 엄마를 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러게 병원에 좀 가라니까 왜 그렇게 고집을 피우고 안가는 거야, 엄마. 이제 제발 자식들 생각도 좀 하세요. 엄마, 제발.” 이제 제발 자식 생각들도 좀 하라니! 내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내 뻔뻔함에 스스로 놀란다. 엄마한테, 우리 엄마한테 제발 자식 생각들도 좀 하라니. 장애의 몸을 이끌고 동생 집에서 파출부를 하면서, 그 온갖 수모와 굴욕을 참아가며 자식 셋 공부 시키고 겨우 사람 구실하게 만들어 놨더니 금지옥엽으로 키운 막내 자식 입에서 제발 자식 생각 좀 하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게 일평생을 남들에게 당하기만 하고 산 엄마. 우리 엄마.


엄마의 전화기에 부재중 전화가 14건 찍힌 후에 엄마는 전화를 받는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걱정과 짜증, 그리고 안도 등등의 마음이 한데 섞여 또 화를 내고 말았다. “그렇게 전화 안 받을 거면 도대체 전화기는 왜 들고 다녀?”로 시작되는 화풀이가 시작되는데, 이쯤 되면 엄마도 목소리가 커지고 화를 내고 해야 할 타이밍이 됐는데 계속 체념한 목소리로 “그래 내가 잘못했다. 미안해”만 연발하시니 오히려 덜컥 겁이 났다. ‘우리 엄마 이제 진짜 늙었구나.’ 엄마에게 화를 낸 것에 대한 후회와 엄마에 대한 미안함, 엄마 인생의 안타까움에 전화를 끊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벼락 가난뱅이가 된 집안을 탓하기엔 너무 어렸고, 고기배달을 다녀오던 엄마가 창피해서 길거리에서 만났을 때에는 골목길로 숨을 만큼 정신적으로 미성숙했던 어린 시절, 내게 유일한 위안은 음악 밖에 없었고, 비틀즈와 아바, 베리 매닐로우의 테이프가 유일한 친구였다. 그 테이프들이 다 늘어질 무렵 눈에 띈, 음료수 사은품으로 들어온 ‘존 레넌 스토리’ 테이프. 그 테이프 속 존 레넌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감정이입이 되어서 이었을까? ‘엄마 가지마세요, 아빠 돌아오세요.’ 라는 ‘마더’(Mother)의 가사를 나지막이 읊조리는 여자 성우의 목소리에 감정이 북받쳐 올랐었고, 알퐁소 도데의 ‘꼬마 철학자’를 읽으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삼십 여 년이 지난 지금, 엄마와의 전화를 끊고 다시 ‘마더’의 가사를 읊조린다. ‘엄마 가지마세요, 아빠 돌아오세요.’

아빠는 다시 돌아올 수 없겠지만 엄마는 아직은 내 곁을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난 아직까지 엄마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고맙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기에, 그 말을 전하기 전까지는 엄마는 내 곁에 있어야 한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은 내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하고, 올해에는 제발 엄마와 싸우지 않고 5분 이상 이야기할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엄마,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요. 제가 내년 엄마 생일에는 엄마 좋아하시는 소고기 미역국 끓여 드릴게요. 엄마 아들 이제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엄마. 난 엄마한테 보여줄게 아직 너무 많이 남아있으니, 엄마! 오래 옆에 있어 주세요. 사랑해요.”

다가오는 설에는 엄마에게 꼭 이 말을 해야겠다. 엄마, 우리 엄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