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훈의 스테레오마인드]그것이 인생이다

송아지만한 삽살개 두 녀석이 사는 집에 비둘기 가족이 이사를 왔다. 2층 창틀 처마에 전세계약서도 쓰지 않고 살림살이부터 옮기기 시작했는데….

누군가 내게 다음 생엔 누구로 태어나고 싶냐고 물으면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까뮈’라는 대답이 나온다. ‘이방인’의 알베르 까뮈도 아니고 ‘흑인 오르페’의 마르셀 까뮈도 아닌 우리 집 바보 강아지 까뮈.


때 되면 밥 줘, 그것도 아빠는 돈 없어서 농약 팍팍 들어간 채소 먹는데 이 녀석은 유기농으로 만든 밥만 줘, 때 되면 사람 간식보다 비싼 간식 먹어,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심심해서 놀아달라고 하면 놀아주는 아빠 있고. 뭐 가끔 아빠가 주짓수 하자며 괴롭히고, 이제 구구단 좀 외우라고 잔소리를 하긴 하지만 그 정도야 밥값 한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니 이보다 좋은 팔자가 어디 있으랴. 괜히 개 팔자가 상팔자가 아니지.

겨우내 방구석에서 늘어지게 자고, 밥 먹을 때가 되면 밥 달라고 낑낑거리고, 그러다 밥 먹으면 싸고, 하루에 5분쯤 애교를 부리다가 다시 자는 게 일이던 녀석이 따뜻한 봄날을 맞이해서 일광욕을 즐기던 중 까뮈가 새로 이사 온 비둘기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온종일 그 비둘기를 보는 게 일이 됐다. 눈만 뜨면 2층 비둘기 전망대로 달려가더니 급기야 비둘기 전망대에서 내려올 생각을 안하고 그 좋아하는 맘마와 간식, 심지어는 까뮈의 존재 이유인 개념이 누나도 마다한 채! 아비 된 입장에서 자식이 식음을 전폐하고 비둘기만 보는 게 걱정돼 하루는 그 녀석을 불러 이야기를 나눴다.
　
“까뮈야, 아빠는 우리 깜깜이가 비둘기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나쁘지 않은데 네가 개로 태어난 이상 이번 생엔 쟤네들이랑 같이 못 놀아. 쟤네들이 안 놀아줘. 구구들은 우리 깜깜이를 무서워해서 안돼요.”
　(·…)

“까뮈야. 쟤네들이 미치지 않은 이상 너랑 놀아주지 않아요. 아마 미쳐도 우리 깜깜이랑은 안 놀아줄 거야. 그리고 깜깜이가 안 놀아주니까 개념이 누나도 심심하잖아. 이제 비둘기는 그만 잊고 개념이 누나에게 돌아가자.”


하지만 아버지의 이런 간절한 가르침에도 이 녀석은 복지부동. 뭇 여성들이 ‘공유 앓이’를 하듯 이 녀석은 온종일 비둘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간식으로 달래도 보고 혼내보기도 했지만 그때뿐.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비둘기 가족에게 세입자 퇴거 명령서를 보내고 사람들의 조언대로 비둘기집이 있던 자리를 상자로 채웠다. 집 없는 설움은 비단 사람뿐만이 아니라 비둘기 가족에게도 찾아왔지만 어쩔 수 없다. 남인 비둘기보다 가족인 강아지부터 살아야 하니까.

문제는 이때부터였는데 비둘기 가족이 이사를 가자 삶의 낙을 잃었는지 까뮈가 식음을 전폐하고 온종일 잠만 자기 시작한다. 그러지 않아도 겨울잠을 자는 곰을 연상시키는 녀석이 잠만 자니 그 녀석을 바라보는 아비의 마음은 더 착잡해지고.

결국 강아지들을 데리고 시골집에 내려갔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그래서 등산로조차 없는 산에 강아지들을 데리고 가서 풀어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한 시간을 넘게 뛰어다닌 후에야 사람 한 명과 강아지 두 마리가 기어서 내려왔다. 다시 활기를 찾은 까뮈와 활기를 찾은 동생 때문에 사는 게 괴로워진 누나 개념이와 활기를 찾은 아들 잡으러 뛰어다니다가 요단강 강물에서 세수하고 돌아온 아버지, 이렇게 세 가족은 피곤해서 밥도 못 먹고 지붕이 들썩일 정도로 코를 골면서 잠을 자고 다음날 서울에 올라왔는데….

박스의 작은 틈을 벌리고 들어온 새 비둘기 가족이 우리 셋을 맞이해줬고, 까뮈는 다시 비둘기 전망대에서 망부석이 돼 비둘기를 바라보고, 아버지는 그런 까뮈를 바라본다. C’est la vie(그것이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