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훈의 스테레오마인드]겨울 추억

우리나라가 열대 국가가 되었나? 그 길고 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슬며시 얼굴을 내미나 싶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 그런데 열대 국가이기엔 겨울이 너무 추운 것 같고. 점점 봄과 가을이 없어지고 여름과 겨울만 남는 느낌이네.

내가 어릴 때에는 지금보다 겨울이 길었던 것 같다. 그 긴 겨울동안 먹을 김장을 하고 연탄을 쟁여놓고 하는 게 엄마에겐 큰 일이었을 터. 한량이었던 아버지가 차를 바꾸거나 소공동에서 양복을 맞출 때에나 나오던 표정이 엄마 얼굴에서는 김장을 할 때와 연탄 5천 장을 들여 놓을 때에나 나왔었다. 다섯 식구 사는 집에 뭘 그렇게 많이 먹는다고 김치는 백 포기씩 하고 연탄은 때봤자 얼마나 땐다고 5천 장이나 들여놓으셨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걸 하고 나서야 전교 1등이 찍힌 성적표에도 보이지 않았던, 엄마의 만족한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김장을 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하는 게 엄마에겐 큰 즐거움이었나 보다.


어릴 때에는 겨울이 길기도 길었지만 춥기도 훨씬 추웠던 것 같다. 한 반에 70명 가까운 학생들이 있는데 영하 3도인가 영하 5도인가 하여튼 그 정도로 추워야 겨우 오전에 땔 수 있을 만큼의 나무만 줬었다. 지금 같으면 교직원이 아동학대로 철창 안 신세가 될 일이지만 그 때는 그것도 좋다고 했던 것 같다. 심지어는 난로를 땔 것 같은 날이면 고구마나 밤 같은 걸 구워 먹기 위해 싸오는 친구도 있었고.

그 때에는 다 같이 없이 살았고, 예나 지금이나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여름보다 겨울이 훨씬 힘든 계절이지만 우리 꼬맹이들은 그런 것은 모르고 겨울이 좋았다. 지금이야 평당 수천만 원의, 선택받은 소수를 위한 강남이지만 겨울만 되면 스케이트장으로 변하는 그 곳이 좋았고, 논두렁에 물을 가두고 만든 스케이트장 한구석에서 모닥불을 쬐며, 언 발을 녹이며 먹었던 어묵이 좋았다. 어디 그뿐인가? 눈만 오면 다들 비료포대를 들고 와서는 동네 뒷산에서 타는 눈썰매가 얼마나 재밌었는데.

시간이 지난 만큼 세상은 변하고 나도 변했다. 눈밭을 뛰어다니던 초등학생 꼬맹이는 머리가 허연 중년이 되었고 더 이상 스케이트도, 비료포대 썰매도 타지 않는다. 한 겨울에도 추운 줄 모르고 하루 종일 밖에서 뛰어놀던 꼬맹이는 혈압 때문에 밖에 나갈 때마다 중무장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고, 엄마는 김장을 담그지 않은지 십 년이 넘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더 이상 연탄을 살 필요도 없고, 언제부터인가 엄마가 담근 김장보다 사먹는 김치가 더 맛있어지기 시작했다.


겨울에 먹는 냉면이 얼마나 맛있고, 그 냉면 후에 마시는 코코아가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기분이 얼마나 좋은데. 군고구마나 군밤도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맛있는 건 마찬가지이고, 길거리에서 사먹는 따끈한 국물의 어묵 역시 그대로이다. 우리 집에는 안 오신지 몇 십 년 되었지만 산타 할아버지가 루돌프와 함께 아이가 있는 집에 찾아가는 계절도 겨울이다.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가 잠든 틈에 살며시 왔다 가는 산타 할아버지처럼 계절은 조용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안 입는 옷장 안에 있던 패딩과 스키복을 꺼내고, 겨울용 타이어로 타이어를 바꾸고, 코코아 몇 박스를 사는 것으로 월동 준비는 끝이 났다. 드디어 일 년 중에 내가 가장 신나하는 계절, 사랑하는 사람의 체온이, 그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고마워지는 계절, 겨울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