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마음대로 할거면서"

요즘 유럽에서는 'WAF'(Wife Acceptance Factor)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있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와이프 승인요소'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누라 마음대로'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아마도 모든 의사 결정을 아내가 하고 있는 나의 상황이 자꾸 오버랩이 돼 그러는 것 같다.

집안에 들어오는 전자제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동차와 같은 거액이 들어가는 상황에서도 최종 결정권이 모두 아내에게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 몸을 담보로 한 보험을 가입할 때 조차도 모든 의사결정을 아내가 한다.


그렇다면 회사는 어떨까? 상황을 개인에서 조직으로 가져와 생각해 보도록 하자. 조직의 의사 결정권자는 당연히 대표이사다. 그런 면에서 볼 때, 'PAF'(President Acceptance Factor)라는 용어도 만들어 볼 만하다. '사장 승인요소'가 되겠지만 상황에 따라 '사장 마음대로'라고 불릴지 모르겠다.

예전에 평소 친분이 있던 김 부장으로부터 어느날 연락이 왔다. “간부들 리더십연수를 추진하고자 하니 제안서를 보내달라”는 전화였다. “얼마 전 A기업으로 회사를 옮겼습니다. 이직하고 처음 추진하는 큰 프로젝트이니 특별히 신경 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2~3일 내에 사장의 사인을 받아주겠노라고 약속을 한다. 그리고 1주일 후, “정말 죄송하지만 이번 건은 취소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사장님께서 벌써 다른 업체로 결정을 내리셨네요”라는 전화가 왔다.

그리고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한동안 연락이 뜸하던 김 부장으로부터 다시 활기찬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저희 사장님으로부터 조직의 미래전략 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해 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현상 파악이 먼저 이뤄져야 할 것 같아 연락을 드립니다. 담당자를 이곳으로 보내 주시면 구체적으로 논의하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이번에는 정말로 잘 부탁 한다는 멘트까지 덧붙인다. 우리는 2~3번의 미팅을 갖고 결과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한 후, 사장 보고용의 시행계획서를 꾸며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2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이번에는 김 부장이 우리 회사로 찾아왔다. “대표님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번에도 저희 사장님이 다른 곳으로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매사가 이런 식이네요. 일을 시켜놓고 열심히 준비해 가면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결정을 해버리시네요”라고,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거듭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한다.

내일이라도 당장 회사를 떠날 것처럼 목청을 높여가며 사장을 욕하던 김 부장은 그로부터 5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아직 그 회사에 남아 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예전과 같은 패기와 적극성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사장의 스타일을 파악한 후로는 ‘해봐야 소용없어, 어차피 사장 마음대로 결정할 건데’라는 냉소적 가치관이 형성된 모양이다.

그 후로도 A기업과는 이런 저런 사소한 안건이 몇 번 있었다. 몇 번 출입하면서 내가 느낀 A기업의 조직 문화는 한 마디로 '복지부동(伏地不動)' 이었다.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사장 마음대로’의 PAF가 조직 전체에 퍼지면서 직원들의 창의력과 생기를 모두 죽여버린 것이다.

생각하지 않고 따라만 가는 조직은 결국 ‘열탕 속의 개구리'가 돼 파멸을 맞게 된다. 일을 맡겼으면 끝까지 지켜봐야지, 미덥지 못하다고 리더가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해 버리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조직만 만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