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태백산맥'의 고향을 찾아서

홍교와 그 건너편으로 보이는 벌교/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소설 '태백산맥'을 처음 읽을 무렵, 주인공들이 웃고 절규하고 치열하게 싸우던 벌교는 내 안에서 하나의 성(城)이 되었다. 실재하는 지명이라는 걸 분명히 알면서도, 가상의 공간처럼 내 마음대로 성을 쌓고 무너뜨리고 직접 그 시대를 뛰어다녔다. 세월이 흘러도 가슴 속의 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벌교는 한마디로 일인(日人)들에 의해서 구성, 개발된 읍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벌교는 낙안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낙안벌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던 갯가 빈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인들이 전라남도 내륙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시킨 것이었다. (태백산맥 1권 145~146쪽)


벌교를 직접 찾아간 것은 책을 읽은 지 꽤 오래 뒤였던 터라, 내 안의 성도 어느 정도 쇠락해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습과 상상 속에 쌓은 성이 다르다고 해서 새삼 실망하거나, 똑같은 풍경이 있다고 해서 특별히 흥분할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군더더기는 깎여나가고 고갱이만 남은 감흥이 요란하지 않게 가슴 속에 요동치고 있었다. 소화다리, 홍교(횡계다리), 중도방죽, 현부자집, 김범우집…. 소설 속 시대를 상징하는 많은 것들이 남아서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었다. 그 중에서도 홍교는 아주 오랜 시간 나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횡계다리 위에 쌀가마니가 높게 쌓여 있었다. 그것은 모두 스물일곱가마니였는데, 다리 위에 쌓여 있어서 그런지 그 형체는 유별나게 높고 크게 드러나 보였다. 그 쌀가마니들을 제일 먼저 본 것은 김범우였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어젯밤에 총성이 울리고 있는 동안에 그 쌀가마니들이 다리 위에 쌓이고 있었음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태백산맥 4권 174쪽)

막상 홍교 위에 섰을 때, 한쪽을 선택하도록 요구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경계인으로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김범우의 뒷모습은 잘 그려지지 않았다. 마음의 성에서는 수십 번 그려보고 지웠던 모습…. 염상진을 비롯한 빨치산들이, 굶주리는 소작인들을 위해 부잣집을 털어 쌓아놓았다던 쌀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물고기를 잡다 다리쉼을 하려는지 잠시 다리 위로 올라온 백로 한 마리만 먼 바다 쪽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시대의 갈등과 아픔이 돌 틈 어디엔가 성성한 통곡으로 배어 있다는 것을.

벌교 쪽에서 바라본 홍교/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홍교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그 자리에 뗏목을 이어 만든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벌교(筏橋)라는 지명도 따지고 보면 뗏목(筏) 다리(橋)에서 나온 것이다. 홍교는 원래 길이가 80m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32m만 남아있다. 무지개모양으로 휘어진 다리 천장 한 가운데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돌출돼 있다. 다리 밑에는 하류에서 올라온 바닷물이 드나드는데, 밀물 때에는 다리 대부분이 잠기고 썰물 때에는 밑바닥이 거의 드러난다.

다리 끝에서 만나는 동네는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집들도 상점의 간판들도 대부분 지난 세월의 잔해를 이고 지고 서 있었다. 한 때는 일제 수탈의 관문이었던 곳. 좌측 세력과 우측 세력이 교대로 주인이 되었던 곳. 벌교는 소설 속에 현실이 현실 위에 소설이 순간순간 겹쳐지는 곳이다. 그만큼 복잡한 사연을 품고 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구구절절한 사연들조차도 허무할 뿐이다. 같은 민족의 목숨을 담보로 지켜야했던 가치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설령 어느 한 쪽이 승리했다고 하여, 그 전리품이 민중들에게 행복이나 희망이 된 적이 있던가.

바람만 오가는 홍교를 천천히 걸었다. 그 사이에 다리를 지나간 건 조금 전에 보았던 백로 한 마리가 전부였다. 다시 반대 방향으로 다리를 건넜다. 다리의 돌 틈 어디엔가 남아있을 시대의 질곡을 들으려 애써보면서….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리고, 민초들의 함성이 쏟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끝내 나와 함께 걷는 것은 내 그림자일 뿐이었다.

문학의 고향을 찾아가는 과정은 여행자가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행복이다. 작가의 시선을 빌려 바라보는 세상은 내 시선 이상의 의미를 선물하고는 한다. 어느 곳에서든 손에 책 한 권을 쥔 여행자를 만나면 더욱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