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통합검색
청년내일 채움공제 (~종료일 미정)대한민국법무대상 (-1.28)
비트코인 광풍 - 가상화폐가 뭐길래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관련기사89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6월에 만난 백두산의 만년설

<68> 백두산에 오르던 날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입력 : 2017.06.17 09:57
폰트크기
기사공유
편집자주여행은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수단이다. 여행자들이 전하는 세상 곳곳의 이야기는 흥미와 대리만족을 함께 안겨준다. 이호준 작가가 전하는 여행의 뒷얘기와 깨달음,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주차장에서 천지까지 올라가는 계단/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주차장에서 천지까지 올라가는 계단/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백두산에 오른 건 어느 해 6월 초, 즉 이맘 때였다. 중국 퉁화(通化)의 숙소에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맨 먼저 한 일은 창문으로 달려가 하늘을 올려다본 것이었다. 1년 중에 백두산에 올라갈 수 있는 기간은 몇 달 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천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날은 30%에도 못 미친다. 나머지는 구름과 안개, 비바람이 막고 열어주지 않는다. ‘3대가 덕을 쌓아야 천지를 볼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백두산은 개인 여행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가이드의 영향력이 크다. 버스로 이동하는 도중에 가이드가 희망 어린 한마디를 던진다. “이 정도 날씨면 나쁘지 않아요. 기대해볼 만하겠는데요.”

통화에서 백두산 아랫동네인 쑹장허(松江河)까지는 4시간30분 정도 걸린다. 버스는 힘차게 백두산을 향해 달린다. 한참 달리자 산악지대에 가까워지고 있는 듯 침엽수가 자주 눈에 띈다. 하얀 살결의 나부(裸婦)를 닮은 자작나무들도 언뜻 언뜻 모습을 드러낸다. 백두산 권역에 들어섰다는 뜻이다. 끝없이 달릴 것 같던 버스가 어느 순간 멈춰 선다. 드디어 백두산의 들머리 쑹장허에 도착한 것이다.

매표소에 들어가기 전 번듯하게 지어놓은 건물을 바라보는 순간 턱! 하고 가슴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 높다란 입간판에 쓰인 글자는 백두산(白頭山)이 아니라 장백산(長白山, 창바이이산)이다. 백두산의 중국 이름이 장백산이라는 걸 모르고 온 건 아니지만, 돌고 돌아 찾아온 ‘우리의 산’이 남의 이름표를 달고 있는 걸 보고서 속이 편할 리 없다. 지하철 개찰구와 비슷한 곳을 통과하면 진짜 백두산 영역에 접어들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조금 올라가면 백두산까지 오르내리는 셔틀버스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다. 이 버스로 약 9부 능선까지 오르면 서백두(西白頭)주차장이 나오고 거기서부터 계단을 걸어 올라가게 된다. 주차장까지는 40~50분 정도 걸린다.

버스가 위로 올라갈수록 계절은 농익은 늦봄에서 연초록의 초봄으로, 눈이 녹아 흐르는 늦겨울까지 조금씩 뒷걸음질 친다. 어느 순간 차 안에 아! 하는 탄성이 울려 퍼진다. 저 멀리 하얀 눈을 이고 있는 봉우리가 보인다. 누가 말해줄 것도 없이 백두산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말 그대로, 머리에 하얀 눈을 쓰고 있는 산 백두(白頭). 드디어 민족의 영산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으로 다가온다. 갈수록 눈은 더욱 풍성해지고 산의 윤곽도 뚜렷해진다. 6월에 이런 눈을 보다니. 만년설의 위용에 입이 떡 벌어진다.

백두산 정상의 천지. 6월인데도 얼음이 풀리지 않았다./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백두산 정상의 천지. 6월인데도 얼음이 풀리지 않았다./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몸이 움츠러든다. 미처 물러가지 못한 겨울이 늙고 지친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다. 어디를 둘러봐도 눈, 눈, 눈. 점퍼를 꺼내 입고 하늘 못(天池)으로 가는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묵묵히 올라간다. 어디를 둘러봐도 절경이다. 한 순간 정상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한번 올려다본다. 구름 사이로 파란하늘이 언뜻언뜻 보인다. 이 정도면 천지를 볼 수 있겠다. 숨이 차서인지 기대에 차서인지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드디어 정상. 몸이 저절로 앞으로 달려 나간다. 아! 하늘은 무심치 않았다. 시선이 닿은 그곳, 천지가 활짝 품을 열고 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한번쯤 보고 싶어 하는 시원(始原)의 호수.

얼음이 완전히 녹지 않은 천지는 아직 푸른 속살을 감춰두고 있다. 호수 주변에는 눈이 얼마나 쌓여있는지 조금만 움직여도 허벅지까지 푹푹 빠진다. 머릿속 하얗게 바래간다. 어떤 언어를 동원해야 이 순간을 제대로 표현할지 막연할 뿐이다.

너도 나도 중국과 북한을 가르는 ‘5호경계비’에 올라 경쟁적으로 사진을 찍는다. 한쪽은 ‘中國’ 다른 한쪽은 ‘조선’이라고 쓰여 있다. 오른쪽엔 가장 높은 봉우리 장군봉이 하얀 눈을 고깔처럼 쓴 채 천지를 굽어보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한달음에라도 달려갈 수 있을 듯 가까워 보인다. 느닷없이 이데올로기도 미움도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찬다. 태초에 하늘이 열리고 백두산이 백두산이란 이름조차 없었을 때, 그 어디에 네 것 내 것이 있고 그 어디에 경계선이 있었으랴. 지금 이 순간은 감개에 젖은 한 사내가 장엄한 호수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만 중요할 뿐이다.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6월에 만난 백두산의 만년설

※ 이 기사는 빠르고 깊이있는 분석정보를 전하는 VIP 머니투데이(vip.mt.co.kr)에 2017년 6월 16일 (09:57)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0%
  • 0%


오늘의 주요뉴스



종료된칼럼

베스트클릭

실시간 급상승

10.0초

5분간 수집된 조회수 기준

오늘의 운세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