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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없음에 기대어야 시작할 수 있는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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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2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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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나혜경 시인 ‘파리에서 비를 만나면’

[시인의 집]없음에 기대어야 시작할 수 있는 날들
1991년 사화집 ‘개망초꽃 등허리에 상처 난 기다림’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나혜경(1964~ ) 시인의 네 번째 시집 ‘파리에서 비를 만나면’을 읽다 보면 여유와 관조, 넉넉한 마음의 거리가 느껴진다. 여유는 단순히 연륜이나 경제적인 것에서 온다기보다 천성적인 것처럼 보인다. 마음의 거리는 시적 화자의 진술이 아닌 제3자적 관찰에서 오는 ‘느긋함의 거리’, 혹은 “겸손해지는 무릎”(‘흔들리며 균형 잡는’)이라 할 수 있다.

나혜경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시를 줄여 쓰는 동안 말도 조금씩 줄었”(이하 ‘시인의 말’)다면서 “고요가 좀 더 촘촘해지길 바라며 말과 말 사이에는 파리의 풍경을 끌어다 두었”다고 했다. 또 “가끔 이곳에 없는 나를 데려오는 일은 즐겁기도 하고 고되기도 하였으나, 그것조차 바람처럼 왔다 가는 일”이라고 했다. 말을 줄여 고요해지려는 건 시적 지향이면서 삶의 태도다.

놀라지 말자 대지처럼 저수지처럼
네거리에서 이부자리를 펴는 젊은 걸인들처럼

꽃이 꽃을 바라보듯
네가 너를 바라보듯 그렇게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자
퐁뒤나 하끌레트의 긴 저녁 식사와 강아지의 습관과 향수의 취향에 대하여
가던 길을 계속 가자
개선문에서 샹젤리제를 지나 콩코드 광장으로 튈리르 공원으로
뛰던 길을 계속 뛰자

비에게도 임무가 있다면
뜨겁다와 차다, 얇다와 두껍다를 섞는 일

빗방울로는 무엇이라도 끊지 말고 연결시키자
무수한 점으로 달아나려는 것들을 이어 붙여 말을 만들자
빗방울을 닦아내지 말자

달빛처럼 낙화처럼 달곰쌉쌀하게 지나가는 비 에스프레소와 바게트로
간단한 식사를 학습하는 동안 아무도 모르게 흩어진 이름을 간절히 부르기도 하는 비

울거나 키스하거나 누워 비를 맞거나 포옹하거나
걸으며 음식을 먹거나 간섭하지 않았던 도시에서 빈손으로 돌아왔으나
마술사처럼 나는 낭만을 귓바퀴에 올려놓고 만지작거리고 있다
쏟아지지 않게 증발하지 않게
조심조심하며

- ‘파리에서 비를 만나면’ 전문


파리를 여행하는데 비가 내리면 어찌해야 할까. 시인은 먼저 “놀라지 말”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가”고, “뛰던 길을 계속 뛰”고, “빗방울을 닦아내지 말자”고 제안한다. 파리의 “젊은 걸인들”은 비가 와도 피할 곳이 없다. “네거리에 이부자리를 펴”고 비를 맞으며 잘 수밖에 없다. 비가 온다고 갑자기 뛰면 그들에게 미안하므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걷자는 것이다.

그러다가 빗방울이 굵어지면, 그들이 안 보이면 “개선문에서 샹젤리제를 지나 콩코드 광장”으로 뛰고, 다시 “튈리르 공원으로” 뛰자는 것. 그새 비 맞은 몸이 다 젖었다. 그래도 시인은 젖은 몸을 닦지 말자 한다. 공원 근처 카페에 들러 “에스프레소와 바게트로 간단한 식사를 학습하는 동안”에 “이 모든 가난한 곳”(‘손발이 따뜻한 사람’)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자는 것이다.

시인은 카페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긴다. “비에게도 임무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에스프레소는 뜨겁고, 비는 차다. 바게트는 두껍고 비는 얇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앞에 앉은 사람과의 대화는 중단된다. 눈을 뜬다. “빗방울로는 무엇이라도 끊지 말고 연결시키자” 결심한다. 잠시 딴짓에 미안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앞에 앉아 있는 사람 아니던가. “무수한 점으로 달아나려는 것들을 이어 붙여 말을 만”든다. 다시 대화가 이어진다.

파리는 “울거나 키스하거나 누워 비를 맞거나 포옹하거나/ 걸으며 음식을 먹거나 간섭하지 않”는다. 시인의 눈에는 이 모든 것이 낭만이며 자유다. “빗방울을 닦아내지 말자”는 것은 그들과 함께한 시간과 추억, 그들 속으로 스며드는 일이다. “흩어진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행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여행은 다시 올 이유를 곳곳에 숨기”(이하 ‘다시, 몽마르트르’)고 있다. 여행의 참맛은 “어떤 것은 많은 것과 바꾸고도 두고두고 좋을 수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 끝나면 밥 한번 먹자

갚아야 할 빚이 두 달째 밀려 있다
4월이 오면, 아니 5월이 오면
매일 빚 갚으며 행복하자

꺼도 꺼도 살아나는 불씨는
병원도 호텔도 집도 감옥으로 만들었다

봄 감옥에 갇혀
연로하신 부모님도 오래 만나지 못했다

봄이 왔어도 봄 아니다

- ‘2020년 3월 23일’ 전문


밥은 살아 있음의 상징이다. 배가 고프면 밥 먹을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단식을 할 경우 “오직, 밥 생각만”(이하 ‘단식을 하면’)하는 것은 당연한 생존 욕구다. “사람을 만날 일”도, 수다를 떨거나 “땀 흘릴 일도 없”다. 시인은 “사랑을 끊으면 사랑에 갇히고/ 밥을 끊으면 밥에 갇힌다”고 했다.

코로나19로 “세상은 시끄럽”(‘빈틈엔 꽃’)다. “코로나 끝나면 밥 한번 먹자”는 약속은 “갚아야 할 빚”이 되었다. 벌써 8월 중순이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가 사라지기는커녕 2차 유행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일상적인 삶은 뒤죽박죽이 되었고, 가까운 사람을 만나 차 한잔 마시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꺼도 꺼도 살아나는 불씨”에 “병원도 호텔도 집도 감옥”이 되었다.

코로나19는 “연로하신 부모님도 오래 만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집 밖에 나가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같이 시장을 보고, 밥을 먹고, 여행을 가는 평범한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다. 이럴 때 시인은 “한 발 나아갈 수 없을 땐/ 제자리에서 저렇게 깊어”(‘나무, 홀로 푸르다’)질 것을 권한다.

시장 모퉁이 고려시계점도 시계들도 멈춰 서 있다
열 시 반 네 시 다섯 시 오십 분

가리키는 시간이
송파 세 모녀가 죄송한 마음 안고 번개탄을 피우는
자위야 해변에서 보트피플이 침몰하는
짐바브웨 소년이 굶어 죽어가는
그런, 시간이 아니길

오 분 늦은 시계를 가진 나는 오 분 늦은 채
멈출 곳을 찾아 시장을 돌고 도는데
구두점 없는 문장처럼 이어지는 상가들

- ‘멈춘 시간’ 전문


멈추어야 비로소 보이는 세상이 있다. “딱 그만큼의, 촌각”(이하 ‘사월’)쯤 되는, “벽이 벽을 바라보며 창을 생각하는 동안/ 내가 나를 바라보며 너를 생각하는 동안”에도 힘없는 사람들의 목숨은 위태롭다. 세상이 “아직 못다 채운 빈틈”(‘빈틈엔 꽃’)이다.

“시장 모퉁이 고려시계점” 앞을 지나던 시인은 가던 길을 멈추고 진열된 시계들을 본다. “열 시 반 네 시 다섯 시 오십 분”에 멈춘 시간을 보는 순간 시인은 각각의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을 떠올린다. 번개탄을 피우고 죽은 “송파 세 모녀”, “자위야 해변에서” 침몰하는 보트피플, “굶어 죽어가는” 짐바브웨 소년. “그런, 시간이 아니길” 시인은 간절히 기도한다.

“오 분 늦은 시계”는 한 발 뒤에서 바라보는 세상이다. 삶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면서 겸손해지는 시간이다. 어쩌면 여유와 관조, “한 침묵으로 고달픈”(‘무의식중에’) 몸이 감내해야 할 순간이다. “세상과 나 사이, 고여 있는 소리와 색”(이하 ‘저 맹인의 눈이야말로 진정 평등한 눈이 아니겠는가?’)을 “이제 버려야겠다”는 간극이기도 하다. “곱으로 계산되는 그런 거리”(‘두 송이씩 지는 섬’)에 존재하는 시인에겐 지금 “멈출 곳”이 필요하다. “없음에 기대어야 시작할 수 있는 날들”(‘다행이다’)이 새삼 궁금해진다.

◇ 파리에서 비를 만나면=나혜경 지음. 역락 펴냄. 120쪽/1만3000원.


[시인의 집]없음에 기대어야 시작할 수 있는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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