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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 200만평 대지주가 되다

[경제기행]삼성, 중교리에서 타임스퀘어까지③

성화용의인사이드 머니투데이 성화용 기자 |입력 : 2004.10.06 09:41|조회 : 37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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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26세의 청년 이병철은 부친으로부터 받은 연 소출 삼백섬의 사업자금을 불과 1년여만에 1만섬 소출로 불리는 비상한 사업수완을 보인다. 50년을 이어가는 호암의 사업력 제 1호는 바로 마산에서 시작된다.

그는 동업자 두명과 함께 1만원씩을 출자해 3만원을 모은다. 여기에 식산은행(산업은행 전신) 마산지점의 일본인 지점장 하라다(平田)로부터 대출 받은 돈을 합해 마산에서 가장 큰 정미소를 시작한다. 상호는 협동정미소. '조선인은 단결심이 없어 공동사업을 못한다'고 멸시하던 일본인들에 대한 반발심이 '협동'이라는 상호를 쓰게 만들었다.

협동정미소 터는 흔적도 없고

이 협동정미소가 지금까지 남아있을 리 없다. 그 터가 어딘지를 알아내는 데도 애를 먹었다. 고향마을 한 촌로의 증언과 두어번의 확인절차를 거쳐 북마산의 옛 창신고등학교 자리를 찾아야 했다.

의령을 빠져나와 군북 톨게이트에서 남해 고속도로를 타고 마산을 향했다. 차로 30분도 안걸리는 가까운 거리. 서마산 인터체인지로 들어와 수소문 끝에 북마산 상남동 거리로 들어섰다.

옛 창신고 터 옆에 협동정미소가 붙어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창신고는 이사갔고 그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주변도 주택가와 상가로 뒤덮여 1930년대 쌀 섬을 날라 도정하던 풍광을 유추할 길이 없었다.

27세, 200만평 대지주가 되다
27세, 200만평 대지주가 되다


길건너 농협 지점과 인근 상점을 들러 두루 물었지만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반문의 연속. 한국 근현대 경제사에서 첫손을 꼽아 마땅한 대사업가 호암의 1호 사업장이 불과 70년도 안 지났는데 그 흔적이 지워졌구나 싶어 허망하기만 했다.

정미소 터에서 항구까지는 직선거리로 1킬로미터가 안돼 보였다. 도정을 마친 수백만섬의 미곡이 마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됐다고 한다.

호암은 사업 시작 당시의 마산을 '물 맑고 기후 온화한 아담한 항구'라고 묘사했지만 지금은 수출자유지역과 인근 공단의 물류가 집중되는 데다 북마산의 구도로들이 영 복잡해 길 찾기도 쉽지 않았다.

비상한 이재 수완

호암이 마산에서 사업을 시작한 것은 사업자금이 아무래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서울이나 부산, 대구 등 대도시는 일본인들이 상권을 잡고 있어 부족한 자본으로 끼어들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 곳에서 시작한 호암의 사업이 처음부터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인천의 미곡거래소에서 형성되는 시세를 예상해 업자들 끼리 미리 쌀 거래를 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낸 것이다.

당시 미곡거래는 일종의 선물(先物)거래였다. 1년만에 자본금의 3분의2를 까먹어 동업자 한 사람이 해산을 제의하는 곡절을 겪게 된다.

여기서 호암은 타고난 이재를 발휘한다. 패인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자 마자 시세가 오를 때 팔고 떨어질 때 사는 전략으로 180도 전환한다.

이듬해 결산에서는 출자금 3만원 외에 2만원의 이익을 냈다. 합리적인 선물 거래 전략으로 정미소 사업이 안정궤도에 들어서자 그는 매물로 나와있던 운수업체 '마산일출자동차회사'를 인수해 사업을 더욱 확장한다.

지배인에게 사업을 맡기고 요정출입을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호암 스스로 "시간과 돈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마산의 모든 요정이 단골이었다"고 회고할 정도의 방일한 생활이 이어졌다.

호기심에 '천해관(天海館)'이라는 호암의 단골 요정을 수소문했지만 일제시대 북마산 접어드는 구도로 가에 있었다는 그 요정의 터 역시 지금은 길을 넓혀 자취가 없었다.

금융을 이용해 땅부자가 되다

사업의 확장과 함께 호암은 순식간에 땅부자가 된다. 그는 사업 초기부터 금융을 이용하는 재능이 탁월했다. 그의 계산을 그대로 옮겨 보자.

논 한 마지기(200평) 값이 50원 했다. 그걸 사서 소작을 주면 소작료로 벼 한섬 값인 15원이 들어온다. 여기서 관리비 1원, 지세(地稅) 1원, 잡비 1원을 뺀 실수입이 12원이다. 연 7.3%의 은행이자 비용은 3원65전. 결국 50원을 투자하면 8원35전의 순익이 남는다.

호암은 일제의 농민수탈정책으로 이농자가 속출한 탓에 생긴 '틈새'를 발견한 후 토지구입에 나선다. 예의 하라다 지점장을 설득해 감정가의 80%까지 융자를 받기로 했는데, 실제로 대출을 받아보니 매입 대금을 전액 지불하고도 돈이 남았다.

땅 짚고 헤엄치기. 호암은 김해평야의 경작이 가능한 땅을 한 평도 남김없이 사들이기로 작정했다. 식산은행의 금고를 자신의 금고로 알았다. 그렇게 모은 땅이 1년도 안돼 200만평. 만 27세의 나이로 소출 1만섬, 만석꾼이 된 것이다.

그러나 재난과도 같은 반전이 청년 사업가 호암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일 전쟁이 터지면서 일본정부의 비상조치로 식산은행이 대출을 중단했다. 폭락한 시세대로 모든 걸 정리할 수 밖에 없었다.

땅을 팔고 정미소와 운수업체도 넘겨서 은행 빚을 갚은 후 남은 건 전답 10만평과 현금 2만원. 사업을 시작할 당시로 되돌아 온 것이다.

어찌됐든 호암은 '금융'에 대한 재능이 비상했던 것 같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 금융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여러 차례의 차관도입 등을 통해 사업을 키우는 재주를 발휘한다.

또 그는 1950년대 4개 시중은행 주식의 절반가량을 소유하면서 실질적으로 금융을 지배하기도 한다. 그 후로도 오랬동안 몇몇 시중은행장 자리는 삼성이 쥐락 펴락하는 시대가 이어졌다.


헛되구나 200만평 대지주의 꿈

가는 비가 내리는 9월의 김해평야를 바라보며 다시 호암을 생각했다. 도로 갓길에 차를 대고 바라본 평야는 끝이 안보였다. 저쪽 멀리가 김해쯤 되고, 이쪽 끝으로는 마산이 연결된다.

27세, 200만평 대지주가 되다


당시의 기록을 찾을 길 없어 호암이 소유했던 전답이 이쯤 되지 않았을까, 되지도 않는 어림으로 문득 차를 세웠을 뿐이다.

30도 안된 나이에 '산하(山河)로써 경계(境界)를 삼았던' 대지주 이병철. 재앙처럼 찾아온 전화(戰禍)에 사업을 정리하면서 한 바탕 긴 꿈을 꾸었다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표현대로 만감이 교차했겠지만 그는 젊은 나이에도 침착하게 실패를 받아들였다. 수완을 발휘해 땅부자가 된 것 보다 훨씬 더 무거운 사업가로서의 자질이다.

호암은 이 때 '사업은 반드시 시기와 정세에 맞춰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국내외 정세를 통찰하면서 직관력을 키워야 한다. 대세가 기울면 깨끗이 미련을 접고 차선의 길을 택해야 한다'는 뼈 아픈 배움을 새긴 것이다.

그는 마산에서의 실패 후 곧바로 중국대륙으로 여행을 떠나며 재기를 꿈꾼다. 패기와 가능성으로 충일했던 시절이니, 한 차례 시련으로 완전히 무너질 일은 아니었다.

그 때의 교훈은 오히려 이후 50년간 이어질 그의 사업력에 몇차례 극적인 결단을 보태주고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왕성했던 사업을 전격적으로 접고 3년여간 낙향했던 일이나 1970년대 경남 통영군 안정리에 150만평 부지를 확보하고서도 오일쇼크를 맞아 조선소 건설을 과감히 포기한 일은 '물러서는 용기'를 체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훗날 부정축재자로 몰려 세금을 추징당하고 재산을 빼앗겼을 때, 또 10년을 공들여 건설한 한국비료를 고스란히 헌납했을 때 그가 새긴 고통은 이와 전혀 성격이 다르다.

완벽주의자인 만큼 가슴에 새겨진 상처는 쉬 아물기 어려웠을 터인데도 그는 상흔을 안으로 갈무리하는 또 다른 능력이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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