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서 지인 살해했지만 '무죄', 11년만에 한국경찰에 구속

머니투데이

김민중 기자

11년 전 살인 사건이 일어난 필리핀 세부의 한 빌라. /사진제공=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그래픽제공=뉴스1

전모씨(41·무직)는 별다른 직업 없이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러다 2005년 6월 어느 날 필리핀 세부로 건너갔다. 현지에서 가이드로 일하던 지인 A씨가 "한국에서 고생하지 말고 필리핀 와서 함께 살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전씨는 A씨 집에 얹혀살며 용돈까지 받아 썼다. A씨 소개로 가이드 일도 얻었다. 둘은 필리핀인 가정부를 두고 생활했다. 풍족한 삶이었다.

사건은 그 해 10월5일 새벽에 일어났다. 밤새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온 전씨는 A씨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돈 문제였다. 격분한 전씨는 흉기로 A씨를 찔렀고, A씨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전씨는 인근 호텔로 달아났지만, 그날 저녁 9시40분쯤 현지 경찰에 체포됐다. 얼마 뒤 재판에 넘겨졌다.

그러나 사건발생 후 5년이 흐른 2010년 10월21일 전씨는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전씨가 범행을 자백하고 여러 증거가 있었지만, 목격자였던 필리핀인 가정부가 재판에 나오지 않아 '증거불충분'이 됐다. 한국에서라면 있기 어려운 일이었다. 사건은 그렇게 마침표를 찍는 듯했다.

11년 전 살인 사건이 일어난 필리핀 세부의 한 빌라. /사진제공=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A씨가 없는 필리핀에서 전씨는 불법체류자로 전락했다. 필리핀인 여성과 결혼해 자녀 2명을 낳았지만, 한국에서처럼 생활고에 시달렸다. 더는 필리핀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전씨는 올해 초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에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지난 3월31일 한국으로 돌아왔다. 처벌받을 각오를 하고서다.

한국 경찰이 이 같은 첩보를 입수하고 전씨에 대한 수사에 나섰다. 경찰은 인터폴, 필리핀 현지 경찰과 공조해 사건기록, 범행에 쓰인 흉기, 부검 결과보고서 등을 넘겨받는 한편 다시 전씨의 자백을 받아냈다. 결국, 경찰은 지난 23일 전씨를 체포했다. 전씨는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사건발생 11년 만이었다.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살인 혐의로 김씨를 구속했다고 27일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해외에서 일어난 사건이고 현지 당국의 수사가 있었지만, 우리나라 국민 사이의 일이라 한국경찰이 재수사할 수 있다"며 "없어진 A씨의 반지, 현금 등의 행방에 대해서도 조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