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요구 들으면 뇌물, 거절하면 보복 우려" 묵시적 청탁 딜레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사진=머니투데이DB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피고인들에게는 대가 관계에 대한 인식과 양해가 없었다. 사실상 거절할 수 없는 대통령 요청 행위에 따른 공헌행위 성격을 지녔다. 삼성에 아무런 현안이 없다고 해서 대통령의 요청을 거절할 수 있었겠나? 대가관계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한 청탁을 인정한 원심은 나무는 없는데 숲이 있다고 한 것과 같다"(2017년 10월12일 항소심 1차 공판에서 변호인단 주장 요약)

이번 재판에서 뇌물공여의 요건이 될 '부정한 청탁'이 있었는지 여부는 원심(1심)에 이어 항소심(2심)에서도 중요한 쟁점으로 다뤄졌다. 특히 명시적이 아닌 묵시적 청탁을 인정함에 있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 측의 내심의 인식이 일치했는지 여부를 따져봐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구체성 없는 묵시적 청탁 인정된다면, 삼성의 모든 현안이 청탁의 대상?"=1심에서 재판부는 이 부회장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등 삼성의 개별 현안에 대해 '명시적 청탁'을 했다고 볼 증거는 없다고 보면서도 포괄적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서는 '묵시적 청탁'이 있었다고 봤다.

대통령이 이 부회장의 포괄적 현안을 알 만한 위치에 있었으며 이 부회장 역시 이 현안에 대해 대통령이 직·간접적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직무집행과 관련 부정한 청탁을 한다는 점에 상호 묵시적 인식과 양해가 있었다는 게 특검 측과 1심 재판부 판단이었다. 그러면서도 재판부는 대통령의 적극적인 요구에 이 부회장 등이 수동적으로 응했다고 판시했다.

이 같은 판단이 나온 이후 재계가 가장 우려한 점은 묵시적 청탁을 근거로 사후에 끼워맞추기식 수사나 기소가 가능하지 않겠냐는 지적이었다. 그때로 돌아간다 한들 대통령이 따로 불러 마련한 자리에서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었겠냐는 항변이다.


재계의 이런 고민은 구본무 LG 회장이 지난해 말 '최순실 국정농단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미르·K재단 출연금 관련 "앞으로도 정부가 내라고 하면 다 낼 거냐"는 질문에 대해 "국회에서 입법해 이를 막아달라"고 응수한 데 잘 묻어났다. 청문회 이후 1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관련 국회 입법은 마련되지 않았다.

1심 판결문에도 최지성 삼성 전 미래전략실장(부회장)이 이 부회장으로부터 대통령이 삼성전자에 승마협회장사를 맡기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통령께서 시키시는데 어떻게 안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대목이 나오기도 한다.

한 재계 관계자는 "앞으로 정권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보복을, 정권의 요구에 응하더라도 다음 정권에서 치도곤을 당할 수 있다는 이중 부담을 안게 됐다"고 말했다.

재계로부터 이런 걱정이 제기된 것은 '개별현안에 대한 명시적 청탁'에 대한 뚜렷한 입증은 결국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변호인단 역시 현안의 구체성이 없음을 1심은 물론 2심 첫 재판에서부터 꾸준히 강조했다. 변호인단은 "대통령 직무 범위가 매우 포괄적이어서 직무 자체로는 청탁의 대상을 승계작업으로 특정할 수 없다"며 "청탁 대상의 특정에 관한 당사자들 사이의 발언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다른 묵시적 청탁이 인정된 판례에서는 공여자의 '특정 직무행위에 대한 대가관계'의 인식이 분명한데 삼성의 경우 공여자의 인식이 어땠는지 구체적 판단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특검 측 주장대로라면 삼성의 모든 현안, 예를 들어 갤럭시 S5~S7의 출시나 60여개 계열사의 당시 개별 현안들이 모두 부정한 청탁에 끼워 맞춰질 수 있다는 맹점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는 특검 측이 2심에 와서 공소장 변경을 통해 부정한 청탁의 대상으로서의 현안에 '승계 과정에서의 위상 강화(경영능력 입증) 현안'이라는 추상적인 항목을 추가하면서 과연 어디까지 부정한 청탁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지 더욱 모호해진 측면이 있다.

승계작업을 대가로 부정한 청탁이 오고 갔다고 보기에는 재판과정에서 어색한 정황들도 다수 포착됐다.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간 1차 독대(2014년 9월15일) 이후인 2014년 11월19일,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간 합병이 무산됐고 3차 독대(2016년 2월15일) 바로 다음날에는 삼성 측이 금융지주회사 전환 검토와 관련해 금융위원회에 주식 처분 유예기간 연장을 시도한 것이 무산되기도 했다. 청탁이 있었고, 이것이 성공적이었다면 이런 작업이 무산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또 승마지원에 있어서는 2015년 8월 코어스포츠와 용역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삼성 측이 용역대금이나 수수료를 꾸준히 감액하려는 노력도 엿보였다.

변호인단은 "(승마지원이) 오너의 승계작업에 대한 대가성 지원이었다면 규모 축소를 위해 노력했을 리 없다"고 강조했다.

◇"스포츠 활성화 등은 당시 국정지표…영재센터 등 사회공헌 활동으로 인식"=대통령과 미르·K재단에 출연한 기업간 관계는 헌법재판소 판단에 가장 명료하게 정의돼 있다는 것이 변호인단 주장이다. 대통령이 기업의 재산권을 침해하고 시장경제질서를 훼손했다는 내용이 주다.

부정한 청탁의 존재 여부를 논함에 있어 삼성 측 변호인단은 2심 진행과정 내내 왜 승마지원, 영재센터 지원 등에 나아가게 됐는지를 피력했다. 큰 틀에서 미르·K 재단에 출연하게 된 경위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 부회장 등은 미르·K재단 출연에 대해서는 뇌물공여 혐의 무죄를, 승마지원과 영재센터에 대해서는 각각 유죄를 인정받았다.

대통령이 '문화융성' '스포츠 활성화'를 정부 주요 국정지표로 정해 추구하고 있던 시기인 만큼 사실상 거절할 수 없는 대통령의 요청에 따른 사회공헌 활동으로 인식했다는 설명이다.

변호인 측은 "영재센터의 경우 문체부 차관이 관심을 가졌던 사안이고 삼성전자에 앞서 문화체육관광부와 강원도의 공식 후원을 받았기에 의심없이 지원하게 된 것"이라며 "삼성은 대한빙상연맹의 회장사이자 평창 동계올림픽 메인스폰서라는 점도 감안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승마지원의 경우에도 단독면담시 대통령이 '정유라'라는 이름을 언급조차 안했다"며 "비인기 종목이면서 국가 이미지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는 국제대회 출전 후원을 요청하는 것은 정상적인 권한 범위 내의 행위로 인식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