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친구도, 친구 아빠도 못 믿게 됐다

/삽화=김현정 디자인 기자

#직장인 박모씨(54)는 친구들과 술 한 잔 할 때면 이따금씩 집에 데려오곤 했다. 2차로 술을 마시거나 차 한 잔 할 때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막역한 친구들이라 그의 아내·딸도 인사를 텄다. "딸이 다 컸네", "예쁘네"란 칭찬도 기분 좋다. 박씨는 최근 전남 강진서 발생한 여고생 사건을 본 뒤 앞으론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박씨는 "아는 사람도 믿을 수 없다. 조심해서 나쁠 것 없는 세상이 됐다"고 말했다.

'아는 사람'이 '더 무서운 사람'이 됐다. 지난해 딸 친구를 집에 끌어들여 살해한 이영학 사건과 올해 아빠 친구가 용의자가 된 전남 강진 여고생 사건이 잇따라 터져서다. 친구 아빠도, 아빠 친구도 못 믿을 세상이라며 불신(不信)이 커졌다. 학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단단히 당부하며 신변 보호에 신경이 곤두선 분위기다.


'지인이 가해자인 범죄'는 이미 현실이다. 25일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가해자 중 친족을 포함한 '아는 사람'인 경우가 44.3%였다. 이중 '가족과 친척'이 11.7%였다. 청소년 성범죄 가해자 10명 중 4명 이상이 지인인 것이다. 살인도 마찬가지다. 한국여성의전화가 2016년 언론 보도 살인사건을 분석한 결과 남성에게 살해됐거나 살인미수 피해를 당한 여성 238명 중 78.5%(187건)가 애인·남편·주변인 등 친밀한 관계에 있는 이들에게 피해를 입었다.

어떤 이유일까. 프로파일러(범죄 심리 전문가)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안다는 것은 이 사람이 내게 해코지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본 생각이 깔려있다. 긴장도가 떨어질 수 있고 도움을 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오 교수는 "피해자 입장에선 잘못 생각하기 쉽고 가해자 입장에선 범행하기 쉽다"고 분석했다.

이에 지인들도 암묵적 경계의 대상이 됐다. 여기에 최근 잇따라 일련의 사건들이 터지며 불안에 불을 지폈다. 지난해 발생한 '이영학 사건'이 대표적이다. 여중생 딸 친구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였다. 희귀병 친구를 돌보려는 선심(善心)을 악용한 범죄였다. 이달에는 전남 강진 여고생 실종 사건이 터졌다. 용의자는 여고생 A양(16)의 아빠 친구 B씨(51)다. 아르바이트를 소개해준다며 불러낸 뒤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학부모들은 '노심초사'다. 믿을 사람이 없다는 막연한 불안이다. 무조건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고 자녀들에게 당부하고 있다.

초등학생 아들을 둔 직장인 최미영씨(44)는 최근 집에 홈캠을 설치했다. 아들이 혼자 있을 때 무슨 일이 있진 않은지 알고 싶어서다. 친구는 물론, 교사, 친구 부모도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최씨는 "어린 자녀에게 사람을 못 믿도록 교육 시키는 게 싫지만, 친한 사람도 경계하게끔 당부하고 있다"며 "특히 어딜 가는 지, 누굴 만나는 지는 항상 파악을 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불필요한 호의·관심도 불편해졌다. 직장인 김모씨(49)는 최근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과 SNS(사회관계망서비스) 사진 등을 비공개로 바꿨다. 직장 동료들이 와이프·딸 사진을 보고 "예쁘다"고 칭찬한 뒤 왠지 꺼림칙해져서다. 직장인 정영호씨(33)는 이웃에서 이사왔다며 건넨 음식을 먹지 않고 버렸다. 정씨는 "일단 조심해서 나쁠 게 없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불신은 상당히 깊어지고 있고 이미 자기 식구 외에는 완전히 상대를 신뢰하지 않게 됐다. 속된 말로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라며 "일년에 한두번은 이런 사건이 터지고, 그럴 때마다 집안에서부터 그러면 안된다고 교육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