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제재 '구멍' 된 스위스의 '작은 모스크바'…"우리도 어렵다"

알프스 자락에 위치한 스위스 추크 (C) 로이터통신=뉴스1

서방이 부과한 대 러시아 제재로 가장 어려움을 호소하는 도시가 스위스 추크 주(州, 스위스에서는 칸톤)에 있는 추크(Zug)시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WSJ는 현지 관료들이 제재 대상에 오른 러시아 부호 명단을 찾아내는 데도 애를 먹어 실제 제재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고 있고, 추크는 물론 스위스가 전반적으로 서방이 주도하는 대러 제재의 '구멍'이 되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작은 모스크바'서는 제재 명단 찾기도 어려워" 낮은 세율 등으로 인해 금융 중심지가 된 '부자 도시' 추크에는 원래 러시아 억만장자들의 별장과 이들이 설립한 회사의 사무실들이 많다. 예를 들어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독일 등 유럽 각국으로 전달하는 노르트스트림 1과 노르트스트림 2의 본사가 위치해있다. 러시아 최대 국영 가스업체 가스프롬 PJSC의 에너지 트레이딩 부서도 추크에 있다.


많은 러시아 억만장자들이 추크에 집이나 사업체를 갖고 있어서 추크 칸톤의 야당은 알프스산 자락에 있는 이 도시의 관광 테마 중 하나로 '올리가르히 투어(Oligarch's Tour)'를 기획할 정도였다. 올리가르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일정한 친분이 있는 러시아의 신흥 재벌 혹은 부호를 뜻한다.

추크시는 '작은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러시아의 존재감이 컸고, 도시 주변에 모스크바처럼 '크렘린'(러시아어로 성벽을 의미)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농담도 나왔다.

하지만 이 시는 지난 2월 스위스 정부가 유럽의 대러 제재 대열에 동참하겠다고 선언하면서 각종 난관에 봉착했다.


우선 추크의 관료들은 러시아 부호 제재 명단을 찾아내는 것부터 어렵다고 호소했다.

5층에 있는 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6명으로 구성된 추크의 대러 제재 담당팀은 스위스 정부의 제재 대상 명단에 있는 수백 명의 러시아 올리가르히가 공식적으로 소유한 주택이나 지역 사업체를 확인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추크 칸톤의 재무담당 이사인 하인즈 탠러는 "그들은 키릴 문자로 된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고 종종 앞뒤가 맞지 않는 300페이지에 달하는 제재 대상 명단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탠러 이사는 "이번 일은 '외국인 투자를 위한 안전한 장소'라는 추크의 명성을 위태롭게 한다"면서 "지금은 매우 어려운 시기이다. 특히 추크 칸톤에는 특히 그렇다"고 언급했다.

대러 제재팀은 추크 칸톤에 등록된 3만여개 업체 가운데 지금까지 제재 대상자가 보유한 업체 딱 1곳만 찾아냈다. 이 같은 분위기는 추크 칸톤에만 그치지 않는다. 스위스는 러시아를 제재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곳에서 운영되는 러시아 기업체들에 대한 실제 행동은 거의 취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서방국들은 세계 금융 중심지인 스위스가 제 몫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러시아산 상품 80%, 스위스 통해 거래

알프스 자락에 위치한 스위스 추크 (C) 로이터통신=뉴스1

WSJ에 따르면 러시아산 상품의 80%는 스위스를 통해 거래돼왔다. 추크 혹은 제네바가 관문이다. 스위스 은행연합에 따르면 스위스 은행들은 러시아 고객들을 위해 약 1500억 달러(약 195조7500억원) 규모 자산을 운용하고 있다.

취리히에 본부를 둔 투명성 단체인 퍼블릭 아이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의 측근인 올리가르히 32명이 스위스에 부동산, 은행 계좌 또는 사업을 갖고 있다.

스위스 정부가 제재를 시작한 지 4개월 동안 68억달러(약 8조8808억원)의 러시아 금융자산이 동결됐고 15곳의 주택 등 부동산이 압류됐다.

반면 유럽연합(EU) 국가들은 140억달러(약 18조2868억원) 상당의 러시아 금융자산과 요트, 헬리콥터, 부동산과 200억달러(약 26조1200억원)의 러시아 중앙은행 자산을 동결했다. 이밖에 2000억달러(약 261조1800억원) 상당의 금융거래를 차단했다. 영국령 저지아일랜드 당국은 러시아 올리가르히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자산 70억달러(약 9조1327억원) 상당을 동결했다.

미 상원의원들은 비공식적으로 스위스 당국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제재에 나서도록 압박해왔다. 미 상원 안보협력위원장인 로저 위커 상원의원은 "스위스가 러시아의 세계 금융 시스템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스위스 정부는 이 같은 비난에 맞서고 있다. 스위스가 EU의 제재조치에 동의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며 최선을 다해 제재 대상 자산을 추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름 반도를 합병한 이후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가 취해졌고 이후 푸틴과 러시아 부호들은 제재 회피를 위해 틈새를 활용해왔다.

스위스 규제 당국의 인력 부족도 약점으로 꼽힌다. 스위스 국가경제국(SECO)에서 제재를 전담하는 인원은 최근까지 10명뿐이었다가 최근 15명으로 늘었다.

또 스위스의 기업등록은 철저한 비밀주의로 일관돼 있어서 자산 실소유자를 밝히는 것이 매우 어렵다. 러시아 부호들이 수십억달러의 자산을 부인과 자녀 이름으로 이전한 것도 걸림돌이다.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명의 이전이 크게 늘었다.

멜니첸코 부인 제재 명단에 겨우 올렸지만 회사는 피해가

러시아 부호 안드레이 멜니첸코가 소유한 세계 최대 규모 요트(메가요트). 'A'라는 이름의 이 요트는 이탈리아 당국이 압류했다. (C) 로이터통신=뉴스1

푸틴 대통령 집권 초기부터 관련 인사들은 추크에 진출했다. 푸틴은 이곳의 멋들어진 아르누보 양식 궁전 테아트르 카시노에서 기념식도 했다. 러시아군이 체첸 공화국 반군을 섬멸하던 2002년 푸틴 대통령은 추크의 유력기업인 단체인 비핵화 포럼으로부터 평화상을 받은 것이다.

러시아 부호들 다수가 추크에서 멀쩡히 사업하고 있다. 아브라모비치가 대주주인 러시아 제철 및 탄광회사 에브라즈 PLC의 판매부서가 추크에 있다. 런던 증시에 상장된 에브라즈는 영국의 제재를 받았지만 스위스와 EU의 제제를 받지는 않았다.

미국과 영국 정부는 스위스 정부가 러시아 부호들의 자산을 파악해 동결할 것을 기대하지만, 법령으로 금융비밀을 보호하도록 돼 있는 스위스에서 소유자를 밝혀내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스위스 변호사들은 대리하는 의뢰인의 신분을 당국에 밝히지 않도록 보장된다. 스위스 기업등록제도도 실소유자를 밝히지 않아도 되도록 돼 있다.

스위스에 장기 거주해온 러시아 부호 안드레이 멜니첸코를 스위스 정부가 제재하려 할 때는 신탁 제도가 방패막이 역할을 했다. 그는 다른 러시아 부호 35명과 함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푸틴 대통령을 만났고 지난 3월 9일 EU가 그를 제재 대상에 올렸다. 이탈리아는 세계 최대 규모인 그의 요트를 압류했다.

그러나 멜리첸코가 2001년 설립한 세계 최대 비료회사 유로켐 AG사는 제재를 받지 않았다. 이 회사의 지난해 매출은 102억달러(약 13조2988억원)이다. 추크에 있는 댈러스 빌딩에 입주해 있는 이 회사는 유럽 최대 화학회사들과 공급망에 깊이 관여돼 있다.

EU가 제재를 발표하기 전날 멜리첸코는 이 회사가 키프로스 신탁 소유라며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이 신탁의 수혜자는 멜리첸코의 부인인 세르비아출신 팝 스타 알렉산드라 한 사람만 올라있다. 결국 스위스 정부는 이 회사를 제재 대상으로 지정하지 않았고, 유럽집행위원회는 이 결정에 맞서 알렉산드라를 제재 대상에 올렸다. 이에 스위스도 알렉산드라를 제재 대상으로 올렸지만 유로켐사에 대해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