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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소중한 세가지를 던진 한 기자의 삶

김준형의 돈으로 본 세상 머니투데이 김준형 기자 |입력 : 2005.01.06 18:28|조회 : 26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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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기자가 되는 길? 간단해.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세가지만 포기하면 돼"
고(故)박무 머니투데이 대표가 후배 언론인들에게 들려주던 지론이었다. 고인이 지론을 몸소 실천하며 포기해야 했던 세가지는 돈 시간, 그리고 마지막으로 '건강'이었다.

6일 세상을 뜬 박무대표는 한 시대를 풍미한 경제기자요, 시장의 감시자이자 동반자였으며, 한국 언론사의 새 영역을 개척한 언론 경영인이었다.

'경제기자' 영역 개척

1944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동고, 서울대철학과를 졸업한 뒤 1974년 서울경제신문 정경부에서 기자 첫 발을 내딛었다. 임종건 서울경제신문사장, 임철순 한국일보편집국장, 소설가 김훈, 김수종 한국일보 주필, 박무종 코리아타임즈 사장, 안영섭 명지대 교수 등이 신문사 입사동기이다.

63학번으로 한일회담반대시위 등 격동기를 보낸 6.3세대인 고인은 정론직필의 대가(代價)로 80년 군부쿠데타 당시 남영동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던 반골이었다.

1984년 계열기업간 상호출자규제를 특종, 백상기자대상을 받는 등 한국일보 경제부에서 경제 금융 전문기자로 명성을 날렸다. 1994년, 당시에는 이례적으로 차장급 기자로서 기명칼럼 '메아리'를 연재하며 날카로운 필치와 비판정신을 발휘했다.

이후 경제부장, 논설위원, 편집국장, 이사 겸 논설위원실장을 거치며 국내 언론계에 '경제기자'의 영역을 개척한 '1세대' 경제기자였다.

고인의 활동영역은 언론영역에 머물지 않았다. 경제분야 전문성을 바탕으로 재정경제원 금융산업발전심의위원회 위원, 증권선물위원회 비상임위원을 역임하며 금융시장 발전에도 족적을 남겼다.

증선위원 시절 고인을 지켜봤던 이영호 금융감독원부원장보는 "첨예한 대립으로 증선위가 벽에 부닥칠때마다 고인은 객관적 시각과 경륜으로 문제해결책을 제시했다"며 "특히 구색용 위원이 되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사전 심의준비를 해오는 성실성에 놀랐다"고 돌이켰다.

금발심과 증선위원 시절, 그의 책상에는 항상 민감한 이슈를 담은 안건들에 대한 사전 검토자료가 배달돼 왔다. 하지만 단 한차례도, 심지어 타 매체에 물먹은 후배 기자가 넌즈시 에둘러 확인을 요청할 때도 고인은 공과 사의 금을 단 한번도 넘은 적이 없는 원칙주의자였다.

쌍끌이주..'.엽기' 아닌 아련한 그리움인 이유

고인은 삭막해져가는 세태속에서도 끝까지 선후배, 취재원들과의 술한잔을 소중히 여긴 낭만주의자였다. 한국일보시절 후배기자의 한-일 쌍끌이 어업협상 관련 특종을 기념하기 위해 개발한 '쌍끌이 폭탄주'는 박무기자의 전매특허품이다.

경제부장 시절엔 구두에 술을 담아 돌리는 이른바 '구두주'를 자주 돌리다보니 아침 출근길에 물에 불은 구두 뒤축이 갑자기 떨어져나가는 '교통사고'가 자주 난다며 너털웃음을 웃곤 했다. 일선 취재기자시절에는 경제부처 공무원들이 술먹고 늦게 출근한 날이면 "박무기자와 술먹었다"고 핑계를 대면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관가에 전설처럼 내려온다.

혹자는 박사장의 음주를 '마조히즘'과 '새디즘'의 채찍질에 비유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채찍은 끝없는 자기반성을 촉구하고, 후배들의 기자의식을 깨우며, 취재원들에게 세상의 여론을 전하는 채찍이었기에 뒷사람들에게 '엽기'가 아닌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고인은 경제기자이면서도 정작 자신의 부를 돌보는 데는 낙제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언론사의 경제부장과 편집국장 주필을 지냈지만, 구멍난 곳을 짜깁기한 양복을 입고 다녔다. 늘 자기보다 후배를 먼저 챙기다보니 경제기자 생활을 하면서도 20년을 수유리의 평범한 집에서 살다가 10년전 겨우 일산에 아파트를 하나 장만해 이사했다.

가장 소중한 세가지를 던진 한 기자의 삶
[사진]2003년 6월15일 박무 대표(오른쪽 두번째)가 본사 6기 견습기자들의 탈(脫) 견습행사에 참석, 30년 후배들을 격려하고 있다.

머니투데이 대표를 맡은 뒤에도 전철로 출근하다가 건강에 이상징후가 생기고 회사가 정상궤도에 안착하고 나서야 자신에게 승용차를 허락했다.

고인은 경제계 언론계는 물론 정계와 학계에 이르기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광범위한 교류범위를 유지하며 나라경제와 언론발전을 치열하게 모색했다.

이헌재 경제부총리, 정운찬 서울대총장, 신영무 세종법무법인 대표, 변용식 조선일보 이사, 이장규 중앙일보 대기자 등은 나이와 일을 떠나 고인과 시대를 논했던 벗이다.

특히 언론계에서는 자사 후배는 물론 타사 후배들에게까지 챙겨주는 큰형이었다. 워싱턴 특파원을 지낸 모 언론사 기자는 "출장온 박대표와 저녁을 함께 하는데 '객지에서 고생한다'며 당시로는 적지 않은 달러를 꼬깃꼬깃 타사후배인 나에게 챙겨줘 놀랐다"고 말했다. 고인과 취재현장에서 함께 활동했던 한 언론계 후배는 "오늘 우리는 당대를 풍미한 경제기자 한명을 잃었다"며 고인의 타계를 아쉬워했다.

제대로 된 경제 미디어...이제 겨우 주춧돌 놓았는데

고인은 꿈을 갖고 있었다. 자본과 권력에서 자유롭고 구습과 구태에서 벗어난 제대로 된 경제 미디어를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차근 차근 그의 머릿속에는 꿈이 형상화돼 갔다. 몸담고 있던 한국일보에서 자신의 역할이 다 끝났다고 생각되자 50대 중반의 나이에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종이신문으로 시작했던 그의 구상은 시대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멀티 미디어'로 발전했다.

국내 최초의 온라인 미디어 머니투데이를 설립, 국내 언론계에 실시간 속보매체의 시대를 열었으며 2001년부터 대표이사를 맡아왔다. html, 팝업, 로그파일...같은 정보기술(IT)개념을 젊은 기자들보다 앞서 이해하고 응용한 고인은 말 그대로 '얼리 어댑터'이자 신지식인이었다. 오프라인 경제신문을 창간, 독립언론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며 국내 경제계와 언론계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경제전문가, 기업의 리더, 사심없는 언론인이었던 고인에게도 외도의 유혹이 없지 않았다. 정부로부터 고위직 제의가 있었지만 고인은 "동생들(후배들)을 이렇게 불러 모아놓고 나 혼자 나갈 수 없다"며 개인의 영달을 마다한 의리의 사나이었다.

하지만 언론경영의 길이 쉽지만은 않았다. 거꾸러지고 있는 경기와 얼어붙은 IT업계 상황은 고인의 어깨를 무겁게 했고 몸과 마음속에 병마의 씨앗을 키웠다.

2001년 머니투데이 대표를 맡은뒤 처음 맞는 추석을 앞두고 고인은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직원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파랗게 투명한 하늘이 텅 빈 것 같이 쓸쓸한 느낌을 주는 것은 제 마음에 물기가 말랐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고인은 문약한 기자의 모습으로 좌절하지 않았다. "하나의 기업이 시장의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피와 땀을 흘려야 하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인고해야 합니다. 저는 그 피와 땀을 저 자신과 여러분에게 요청할 생각입니다"라며 직원들을 채찍질 했다. 때론 신새벽 동이 터올때까지 30년 아래 기자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기자의 기개와 언론의 미래, 머니투데이의 꿈을 이야기했다.

지병인 폐암으로 절대안정을 취해야 했을 상황에서도 항암치료로 빠진 머리를 가발로 감추고, 매주 월요일 새벽 회의를 주재했다. "머니투데이가 깨끗하고 당당한 부자들이 존경받는 사회를 만드는데 앞장서야 한다"며 '청부(淸富)'의 화두를 제시하는 등 경제 저널리즘의 방향을 제시하는데 마지막 에너지까지 쏟아냈다.

그 결과 머니투데이는 '원 소스 멀티 유스(One source, Multi Use)'의 새로운 언론모델을 정립하며 최악의 언론 경영 여건 속에서도 2002년 이후 3년 연속 흑자를 기록했다. 기자 120여명을 포함, 직원 200명 규모로 성장한 머니투데이는 고인의 희망대로 '생존'단계를 넘어 '발전'단계로 접어든 것이다.

몸과 마음이 지쳐 있던 어느날 고인은 후배들에게 말했다. "저는 머니투데이에 많은 꿈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웅대하고 화려한 꿈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겨우 그 꿈에 주춧돌 하나를 놓았나 싶은 때, 고인은 가족들과 직원들과 독자들을 뒤로 둔채 먼 길을 떠났다. 고인은 잠시도 쉴틈이 없던 인생 여정에서 비켜나 이제 길고 긴 휴식에 들어갔지만 그의 꿈은 끝나지 않았다. 고인이 꿈꿨던 것보다 훨씬 웅대하고 화려한 꿈을 실현시켜 고인에게 선사하는 건 이제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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