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발목잡는 '사실적시 명예훼손'…폐지 논란

31일 오전 경남 통영지방검찰청으로 서지현 검사를 응원하는 꽃바구니가 속속 도착하고 있다. 통영지청은 두달 간 병가를 내고 휴식을 취하는 서 검사에게 전달이 어렵다는 이유로 꽃바구니를 받지 않고 있다. 서 검사는 8년 전 법무부 핵심 간부로 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2018.1.31/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성폭행 피해를 알리는 '#미투'(#Me too) 열풍 속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존폐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허위사실이 아닌 진실을 폭로해도 처벌하도록 한 현행법 규정이 피해자의 발언권을 부당하게 가로막는다며 이를 폐지해 달라는 청원이 쇄도하고 있다.


26일 법조계와 정치권에 따르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이달초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시켜달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이 청원에는 이날 현재까지 약 3만5000명이 '동의'했다.


청원자는 "허위사실에 따른 명예훼손 처벌은 당연하지만 사실이 명예훼손이 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는 것이 명예훼손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이 답답하다"며 "형법 제307조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정보통신망법) 제70조를 함께 폐지해달라"고 주장했다.

현행 형법 제307조는 공연히 사실을 적시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 2년 이하 징역·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정보통신망법 제70조는 형법과 동일하되 '비방할 목적'이라는 요건이 추가됐다. 처벌은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으로 더 무겁다.

◇법조계 찬반 '팽팽'


이를 두고 법조계에서는 폐지론과 신중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폐지를 주장하는 측은 현행법상 조항이 피해자의 목소리를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범죄 피해자의 경우 명예훼손을 이유로 한 피소 우려로 가해자의 실명을 폭로하기 쉽지 않은 실정이다. 가해자의 실명을 고발할 때는 피해자가 익명을 택하는 경우가 잦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여승무원 성희롱 의혹이 익명 게시판 앱 '블라인드'에 올라온 게 대표적인 사례다.

한 형사전문 변호사는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실명을 밝히고 싶어도 명예훼손죄로 역고소를 당할까봐 밝히지 못한다"며 "피해자의 발언이 진실한 사실인지 여부나 명예훼손의 조각사유인 '공익'은 기준이 불분명한 반면 공개적 폭로의 경우 명예훼손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점은 분명하다. 실제로 칠링 이펙트(chilling effect·냉각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현행 법 규정은 모든 표현 행위가 명예훼손죄의 잠재적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어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킨다는 게 폐지론자들의 주장이다. 민사적 책임을 강화하고, 소수 집단에 대한 혐오의 의도가 명백한 경우(혐오표현)에 한해 처벌하는 등의 방식으로 충분히 부작용을 예방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실관계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를 처벌하는 규정을 폐지해야 한다는 법 개정안은 이미 국회에서 여러차례 발의됐다. 20대 국회에선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16년 9월 대표 발의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로 인해 정부의 정책, 공직 비리 등에 대한 국민의 자유로운 의견제시·비판·여론형성의 권리가 침해받고 있다는 게 금 의원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법안은 여전히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과거 광우병 위험성을 제기한 PD수첩이나 정부의 환율정책을 비판한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떡값검사 명단을 발표한 노회찬 정의당 의원, 국가정보원의 민간단체 사찰 의혹을 제기한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 등이 명예훼손죄가 적용돼 고소당한 대표적 인물들이다.

그러나 신중론도 만만찮다. 표현의 자유 못지않게 개인의 인격권 및 사생활의 자유 역시 보호돼야 하고, 진실한 사실의 적시에 의해 침해될 수 있는 명예도 형법적으로 보호할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반론이다. 또 손해배상 청구의 가능성과 국가의 형벌권에 기초한 형사처벌의 문제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주장도 나온다.

지난 2016년 헌법재판소 역시 인터넷 등에서 사실을 적시해 명예훼손한 경우 처벌하는 개정 전 정보통신망법 제70조 제1항에 대해 조항에 대해 7대 2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김한규 변호사(전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는 "변호사 1944명이 응답한 2016년 설문조사에서는 50%가 사실적시 명예훼손 폐지에 찬성했지만 유지 의견도 33%에 달했다. 16%는 벌금형만 남기는 식으로 보완하자는 견해였다"며 "법조계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이른바 '괴롭힘'의 새로운 형태(사실만 적시하는 방식)로 변형될 수 있는 만큼 입법에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예전에 인스타그램에서 각종 'OO패치'가 유행했는데, 사실이더라도 과거 유흥업소에서 일했다는 개인의 치부를 공연하게 게재하고 유포하는 것은 피해자의 평판에 치명적"이라며 "공익관련성이 없음에도 타인의 약점과 허물을 들추어 공표하는 행위에 대해선 처벌의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명예훼손, 지나간 시대의 범죄"…해외선 폐지 추세

대다수 선진국에서는 사실에 대해선 명예훼손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라는 개념 자체가 드물고 이런 경우 대부분 민사소송으로 해결한다.

미국의 경우 1964년 명예훼손 처벌법을 위헌 처분한 ‘개리슨 대 루이지애나'(Garrison v. Louisiana) 사건 이후 뉴욕과 캘리포니아 등 대부분의 주에서 명예훼손 처벌조항이 위헌 처분되거나 주의회에 의해 자발적으로 폐기됐다. 현재 4개의 주(매사추세츠주, 미네소타주, 몬타나주, 뉴햄프셔주)에서만 명예훼손에 대한 형사처벌 규정을 두고 있다.

유럽도 명예훼손죄를 폐지하는 추세다. 영국은 2010년 사인간 명예훼손죄를 폐지했다. 당시 클레어 와드 영국 법무장관은 "형법상 명예훼손죄는 오늘날처럼 표현의 자유가 권리가 아니었던 지나간 시대의 범죄"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2001년), 사이프러스(2004년), 그루지야(2004년), 루마니아(2006년), 몬테네그로(2011) 등이 차례로 명예훼손죄를 완전 폐지했다.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위스, 일본 등은 사실적시 명예훼손 처벌규정이 있지만 적시된 사실이 진실인 경우 처벌을 면할 수 있는 규정을 두고 있다.

유엔 자유권위원회는 지난 2015년 "진실인 언사마저도 오로지 공익을 위해 구사되지 않는 한 형사처벌될 수 있음에 대해 우려한다"며 "명예훼손의 경우 민법에 의한 제재가 가능하므로 비범죄화를 고려해야 한다"고 우리나라에 권고한 바 있다. 한국은 2019년 11월까지 이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