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엘라 초콜릿박스]여행자의 시선으로 떠난 길은 새롭다

머니투데이

노엘라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가

오전 11시, 오후 5시에 있을 렉처콘서트를 위해 나갈 준비를 하느라 바쁘다. 평소 같으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설렐 터. 하지만 이틀 전 다녀온 부산에서의 피로가 아직 남아있는데다 설상가상 감기몸살까지 겹친 날의 장거리 드라이브는 썩 내키지 않는다.

강연장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5시간. 차 안에서 그 긴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해온다. 차에 타자마자 걸려오는 전화. 도착시간을 확인하는 전화다. 아,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잠이라도 자면 빨리 지나가겠지. 눈을 붙인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에서 깨 시계를 바라본다. 아직도 3시간이나 더 남았다.

‘라디오라도 들으시지요.’ 지루함을 달래고자 기사님께 말한다. 뜻밖에 흘러나온 음악은 베토벤의 비창 소나타.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 한동안 푹 빠져 지냈던 곡이다. 문득 흐르는 음악을 타고 오랫동안 기억하지 못했던 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생각 하나는 두 개, 아니 세 개, 열 개 스무 개의 영감으로 퍼진다. 나는 노트북을 꺼내 들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일이 아니었다면 가져오지 않았을 노트북이다.

오랜 기간, 써야지 마음만 먹고 막상 쓰지 못했던 글이 마치 매듭 풀린 실타래처럼 술술 풀려 내려간다. 손보다 빨리 지나가는 생각을 다 받아 적지 못할까 급한 마음에 재빠르게 글을 써 내려간다. 생각 받아쓰기를 끝낸 난 이번엔 천천히 글을 다듬고 살을 붙인다.

어느덧 이 차 안은 훌륭한 사색의 공간이 된다. 그리고 이내 좀 전과는 다른, 들뜬 여행자가 되어있는 나를 발견한다. 지루하기만 하던, 그저 빨리 지나쳐버리고만 싶던 이 길은 이제 나무가, 하늘이, 굽이질 길이 하나하나 소중하게 느껴지는 여행자의 것이 된다. 같은 목적지를 간다 해도, 여행자의 시선으로 걷는 길은 새롭다. 아무리 멀리,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길은 반가움과 설렘이 담긴 길이다.

베토벤의 비창 소나타에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그리고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 아리아’까지. 음악과 함께 달린 시간은 ‘피곤함에 지쳐 피하고 싶은’이 아닌 사색의 여유를 주는 ‘머물고 싶은 시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유유히 달리는 차의 창문을 살짝 내리고 그 너머 하늘을 올려다본다. 마지막으로 올려다 본 하늘이 이토록 높았던가? 찬 공기가 코끝을 스친다. 오래 머물길 바랐던 이 가을도,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