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의 시작과 끝을 책임 못지면 상(上)남자 될 수 없어"

지난 14일 서울의 한 호텔에 모인 '상차리는 사내' 5인방. 최근 음식과 삶을 다룬 책 '상 차리는 남자? 상남자!'를 낸 이들은 이날 식사를 위해 각자 자신있는 반찬을 만들어 내놓았다. 무생채, 가지무침, 소고기 스튜 등 다양한 음식들이 사내들의 손을 거쳐 완성됐다. 왼쪽부터 유정훈 변호사, 이충노 전 금융컨설턴트, 황석희 영화번역가, 조영학 소설번역가, 강성민 출판사대표. /사진=이동훈 기자 photoguy@

지난 14일 서울 중심의 한 호텔에서 근사한 밥상이 수놓였다. 시각을 자극하고 미각을 부르는 음식들이 가지런히 놓이자, 어느 예쁜 아낙네의 솜씨인가 궁금증이 샘솟았다. 아니 웬걸? 흰머리에 수염에 주름이 가득한 중년 사내 5명이 부엌으로 속속 모여들더니 서로 챙겨온 반찬을 배열하며 품평까지 한다.

“여기 이 제육더덕은 제육의 기름 때문에 와인식초를 넣으면 향이 우아해져요.” 이충노 전 금융컨설턴트가 준비해온 요리에 옆에 있던 이가 나름의 ‘팁’을 알려준다. 이 음식에 양파 들어간 게 영 못마땅했는지, 황석희 영화번역가가 “평소에 양파를 까서 넣으세요?”하고 물었다. 이충노의 대답은 이랬다. “아니, 오늘은 비주얼만 생각했어요.”


서먹하던 분위기가 음식 얘기 하나로 금세 누그러졌다. 이날 모인 5명의 사내는 조영학(소설번역가), 이충노(전 금융컨설턴트), 강성민(출판사대표), 유정훈(변호사), 황석희(영화번역가)씨다. 이들은 최근 ‘상 차리는 남자? 상남자!’라는 책을 냈다. 여성의 전유물로 비칠 법한 부엌을 점령한 사내 5명의 사연과 삶이 오롯이 녹아있는 숨겨놓은 일기장 같은 고백서다.

남자의 요리가 TV를 점령하고, 갖가지 비결과 묘수가 인터넷에 난무하는 시대, 사내들의 음식 이야기가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으나, 이들의 배경은 좀 각별하다. 모두 싱글이 아닌데다, 아내는 부엌 근처도 가지 못하게 하는 철저한 ‘앞치마 전담’의 주인공이고 음식의 맛이 아닌 관계의 멋을 위해 요리를 한다는 점 등이 그렇다.

이날 밥상에는 가지무침, 노각(늙은 오이)무침, 무생채, 간장절임, 소고기 스튜, 청국장 등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 반찬이 수두룩했다. 반찬은 모두 텃밭에서 길어올린 채소나 가장 싱싱한 마트 재료로 만든 유기농 음식이다. 기자가 간혹 “아, 간장절임이네요”하고 아는 척할 땐 “어허, 그게 아니고 단풍귀 간장초절임”이라고 제대로 고쳐줬다.

요리 경력을 따지면 조영학씨가 13년, 이충노씨와 강성민씨가 각각 4년, 황석희씨가 3년, 유정훈씨가 2년 정도다.


◇ '닭살 돋는 아내 사랑이 동기'…"당신 먹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

이들이 엮이게 된 배경은 오래 전부터 요리를 하던 조씨가 페이스북에 살금살금 요리 비법과 음식을 올리면서부터. 처음엔 뭇 사내의 비판과 질타가 쏟아졌다. ‘어디, 남자가 할 게 없어서…’라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조씨는 완성된 음식을 내보이며 당당하게 맞섰다.

이 와중에 이를 지지하던 이가 이씨였다. 그는 ‘페북 친구’를 통해 급기야 조씨를 오프라인에서 만나 등산까지 함께했다. 하산할 땐 비를 배경 삼아 소주를 마시며 각자의 사연을 듣고 서로 깊이 감동했다고 한다. 이렇게 페북을 중심으로 한두 사람이 속속 모여들었고, 끝까지 부엌을 책임질 수 있는 5명이 퍼즐처럼 완성됐다.

조씨의 부엌데기는 전적으로 아내를 위한 사랑에서 시작됐다. 10여 년 전 아내가 발을 다치면서 행복의 의미를 되새긴 그는 아내를 위한 남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부엌을 책임지기로 했다. 20평으로 시작해 40평까지 늘린 텃밭은 그의 보금자리이고, 아내의 아침상을 위한 새벽은 행복의 시작이다.

그가 아내에게 주문처럼 던지는 말, 닭살의 극점으로 비치는 이 말은 ‘You say, it’s done’(당신이 원하면 뭐든지 이루어 드리리)이다.

상남자 5인은 아내의 사랑, 음식의 기억, 아들과의 관계, 최고의 맛 등의 이유로 요리를 시작했다. 시작은 음식 만들기였으나, 지금은 부엌 전체를 책임지는 전업주부로서의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다. /사진=이동훈 기자 photoguy@

조씨의 밥상은 집밥의 결정체다. 청국장, 멸치볶음, 나물 등이 밥상에 오르는데, 조리법은 간단하다. 그의 비법은 최단의 시간으로 최적의 효과를 내는 경제 원리를 요리에 도입하는 식이다. 그래서 그가 새로운 메뉴에 도전할 땐 인터넷 검색을 통해 손쉬운 방식을 터득하고 다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가공한다.

‘요리가 별 것 아니다’라는 개념은 그에겐 일종의 신념이고 그 신념에 찬 목소리는 이렇게 전파된다. “예비 상남자들이여, 맛은 상대적이다. 그러니 부엌을 두려워말라.”

여기 ‘아내 사랑’ 하면 1인분 추가할 젊은 부엌데기의 주인공도 있다. 황씨다. 그와 아내는 24시간 내내 붙어있는 영상번역가로, 마주치는 듯 안 마주치는 듯 살면서도 전혀 지겨운 기색이 없다. ‘나에게 요리는 아내’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는 황씨는 스스로 ‘야매 요리사’라고 고백한다. 일종의 ‘요리 사기꾼’이라는 뜻인데, 겉 요리는 그럴싸한 시각인데, 안은 별로인 식감 때문이다.

“우리 모두 입맛에 민감한 편이 아니어서 일단 먹어서 괜찮으면 무사통과예요. 제 입맛이 워낙 싸서 10만 원짜리 요리와 1만 원짜리 요리의 차이를 잘 모르거든요. 맛보다 더 중요한 건 아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일이죠. 그 자체가 애정 표현의 한 방법인 셈이에요."

◇기억을 소환하고 소통을 꿈꾼다…'밥상으로 돌려놓은 아들의 방황'

학교조차 포기한 사춘기 아들을 돌아오게 하는 방식이 궁금하다면 이씨의 요리에서 해답을 얻을지도 모른다. 아내를 서울에 남겨두고 아들과 단둘이 떠난 양평. 강제 전학 조치로 옮긴 이곳에서 이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들에게 밥상을 내어주는 일뿐이었다.

처음 요리에서 아들은 ‘맛있느냐’는 아빠의 물음에, ‘그닥’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렇게 4년간 정성껏 배우고 익힌 요리에서 아들은 “집밥이 가장 맛있다”고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다. 음식으로 달라진 입과 눈은 아빠를 향한 태도의 변화까지 이뤄냈고, 지금은 밤새도록 웃고 떠드는 말동무 사이가 됐다.

강씨는 병약한 유년 시절을 엄마표 음식으로 버틴 기억을 버리지 못해 요리를 한다. 부족한 재주에도 요리에 매달리는 것도 밀가루 카스테라, 얼려먹던 보리차 설탕물, 콩국에 탄 우뭇가사리 등 엄마표 간식의 기억 때문.

기억의 한가운데, 부모의 엇갈린 음식 문화도 끝없는 도전의 유혹을 불러일으켰다. 진주가 고향인 아버지의 육류, 속초가 고향인 어머니의 해산물이 뒤엉킨 기억은 그가 요리에 손댄 이후 다양한 음식을 만들겠다는 욕심과 맞물렸다.

“그래서 제 요리는 맛에 대한 열정이 부족한 것 같아요. 이것저것 다 먹어봐서 특정한 맛에 대한 또렷한 기억이 없죠. 요리할 때 최고의 맛을 내기보다 다양하게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앞서는 것도 그런 기억 때문이에요.”

늘 받아먹던 기억은 어느날 ‘내가 먹는 음식을 왜 남한테 받아먹나’라는 각성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시작한 요리는 식욕이 없는 아내보다 자신을 위해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자신을 ‘고독한 미식가’라고 불렀다.

◇'최고의 맛'을 위해 요리를 '연구'…"요리의 기술은 법률해석처럼"

다른 부엌데기들이 요리를 ‘정서적’으로 접근했다면, 유씨는 변호사답게 ‘논리적’으로 다가간다. 사실관계를 정확히 파악해야하는 법률가처럼, 요리도 재료의 원리를 잘 이해해야한다는 것이다. 법률해석은 요리의 기술에 해당한다. 어떻게 잘 꾸미고 포장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

그는 이를 위해 로펌을 그만둔 2013년 법전 대신 요리책을 사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일반적인 요리책이 아닌, 엄밀히 말해 ‘재료책’이었다. ‘The Science of Good Cooking‘(좋은 요리의 과학) 등 두 권의 원서를 읽은 그는 참가자 중 가장 빠른 속도로 남들도 인정하는 ‘요리사’ 수준의 실력을 갖췄다.

늘 부엌에서 회를 뜨고 고기를 익히는 장인의 모습을 통해 요리를 시작한 그는 최고의 맛을 내기위해 지금도 ‘연구’ 중이다. 그가 이날 고기 겉면을 바싹 익히는 과학 원리인 ‘마이야르 반응’을 설명할 때, 주변에서 ‘오~’하는 탄성이 쏟아졌다.

상(床)을 차리는 남자가 진정한 상(上)남자라고 주장하는 저자 5인. 이들은 "부엌을 책임지는 남자는 인내와 느림의 미학을 배우는 사람들"이라며 "이들이야말로 가족의 진정한 화목을 지키는 수호신"이라고 강조했다. /사진=이동훈 기자 photoguy@

◇상차림은 요리 과정이 아닌, 구상~정리 과정…"요리는 역사이고 시"

경력이 짧건 길건 이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다. 요리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은 그러나 요리만 하는 과정이 아닌, 요리 전과 후의 모든 순간을 통칭한다.

“시작은 그렇죠. 무얼 만들 것인가로 시작하죠. 하지만 텃밭에서 재료를 가져오고, 요리를 구상하고, 설거지를 한 뒤 남은 재료를 보관하는 일련의 완결 과정을 다 경험해야 진짜 ‘상을 차리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요. 요리하는 사람은 많지만, 우리처럼 구상부터 정리까지 다 하는 사람은 드물 거예요.”

조씨의 말에 강씨가 “특히 냉장고 관리…”하며 운을 맞췄다. 강씨에게 음식은 식물이 땅을 밀어내며 자라는 소리부터 달걀이 팬에 닿을 때 내는 ‘촤르륵’ 하는 소리까지 담아내는 삶의 그릇이다. 음식의 삶이 역사이고 시가 되는 이유다.

음식을 유심히 관찰하면 소통과 관계의 창이 보인다. 강씨는 최근 다시 본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한석규가 대파를 꼼꼼히 씻는 장면을 잊지 못했다. “그간 제가 파를 대충 씻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진액을 완전히 빼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식재료를 그렇게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황씨는 이렇게 반문한다. “음식 만큼 사람에게 직접적인 터치가 있나요? 자신이 만든 음식이 상대방의 체내에 흡입되는 과정만큼 몸과 몸 안을 적시는 게 있을까요. 직접적인 소통의 최고 수단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타인의 먹는 즐거움은 나의 인정욕구…"인내의 요리가 상남자의 조건"

유씨와 이씨는 “결국 내가 만든 음식을 상대방이 즐겁게 먹어주는 것, 그것만큼 이해받고 인정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이는 나를 더 이해하고 내가 누구인지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두 사람은 집밥으로 얻은 소통의 경험을 살려, 조만간 더 큰 범주의 사회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고 전했다.

가장 큰 주제가 마지막으로 남았다. 상(床)을 차리는 남자가 왜 상(上)남자일까. 상남자는 흔히 마초의 의미로 쓰이는데 말이다. 멤버들이 허탈하게 웃으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센 남자 집안에선 불화가 심심찮게 생기죠. 남자들이 부엌을 점령하면 큰 소리 날 일이 없어요. 요리는 인내와 느림의 철학이니까요. 상남자라면 집안을 지킬 줄 알아야겠죠?”

이 말을 끝내자마자 사내들이 다시 음식 얘기로 떠들썩했다. “아,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게 역시 계란찜인 것 같아.” “그러게 말이야, 해도 해도 늘지 않으니….”

◇상(차리는) 남자? 상남자!=조영학·강성민·이충노·유정훈·황석희 지음. 메디치미디어 펴냄/231쪽/1만3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