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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공(子貢)의 마케팅 전략이 던지는 메시지(1)

[김영수의 궁시파차이(恭喜發財)]<10회> - 조직의 미래를 위해 진정한 가치에 투자하라

김영수의 궁시파차이(恭喜發財) 머니투데이 김영수 사학자(史記 전문가) |입력 : 2014.04.02 05:46|조회 : 9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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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공(子貢)의 마케팅 전략이 던지는 메시지(1)
◆ 기라성 같았던 공자의 제자들

공자(기원전 551~479년)는 중국에서는 물론 세계적인 명인이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지 2500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의 부가가치는 조금도 시들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 존재가치는 더 커지고 있다. 최근 중국 당국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의욕적으로 벌이고 있는 국가 홍보 정책의 전면에도 공자가 버티고 있다. 중국은 세계 각지에 '공자 아카데미' 또는 '공자 어학원'을 설립해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홍보하고 있다. 이른바 '신중화주의'를 전파하는데 '소프트 파워'를 들고 나섰고, 그 전면에 중화 문화와 공자를 내세운 것이다.

공자의 위상은 사마천 당시에도 대단했다. 이런 공자의 위상을 감안하여 사마천은 공자의 전기를 제후들에 관한 기록인 '세가'(世家)에 편입시키는 파격을 감행했다. 공자는 제후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신분이나 벼슬로도 세가에 편입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천은 공자의 역사적 문화적 지위를 높게 평가해 세가에 편입시켰고, 이는 사마천 역사관의 진보성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공자는 평생 자신의 유가(儒家) 사상을 제후국들에 전파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인(仁)과 예(禮)를 핵심으로 하는 그의 평화주의 사상은 약육강식으로 넘어가는 당시의 대세와는 맞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공자의 인생은 정치적으로 실패했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는 만년에 고향인 곡부(曲阜, 지금의 산동성 곡부)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후진 교육에 종사하여 놀라운 성과를 후대에 선사했고, 사학(私學)의 창시자라는 타이틀까지 얻게 됐다.

공자는 평생 많은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천하를 주유할 때도 제자들과 함께 다니며 동고동락했다. 이 때문에 공자와 제자들은 남다른 사제의 정을 나누었다. '논어'(論語)가 그 산물이다. 기록에 따르면 공자의 제자는 전후 약 3000명에 이르렀고, 그 중에서 당시 지식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필수 교양이라 할 수 있는 육예(六藝, 예의·음악·활쏘기·말타기·쓰기·셈하기)에 통달한 제자만 70명이 넘었다고 한다. 사마천은 특별히 공자 제자들의 행적은 한데 모아 '중니제자열전'을 편성하면서 이들 모두가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였다고 소개했다.

실제로도 공자의 제자들은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었다. 안빈낙도(安貧樂道)의 덕행으로 잘 알려진 안연(顔淵)을 비롯해, 스승 앞에서도 바른 말을 서슴지 않았던 강직한 성품의 자로(子路), 효성으로 잘 알려진 민자건(閔子騫), 문학의 자하(子夏), 언변의 재아(宰我) 등등 많은 제자들이 후대에까지 이름을 남겼다. 공자의 명성은 제자들의 왕성한 활동으로 세상에 더 널리 알려지게 됐다. 여기에는 특별한 제자 한 사람의 역할이 컸다.

자공의 초상화
자공의 초상화
◆ 다재다능했던 자공

자공은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 '중니제자열전'에는 기본적으로 자공이 언변에 뛰어난 제자로 기록돼 있지만, 바로 이어서 자공은 "천명의 구속을 받지 않고 장사를 잘 해서 재산을 모았으며 예측과 시세 파악을 기가 막히게 잘 했다"고 하여 자공이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번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중니제자열전'의 70명의 인물들 중 자공의 비중은 다른 제자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다. 기록의 분량만 해도 전체의 약1/4을 차지한다. 공자가 가장 아꼈던 제자인 안회의 기록은 자공의 1/10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공자의 생각 여부를 떠나 사마천 자신이 자공에게 큰 관심을 가졌다는 의미다. 더욱이 자공은 '중니제자열전'뿐만 아니라 역대 부자들에 관한 기록인 '화식열전'에도 출연하고 있을 정도로 사마천의 집중 조명을 받고 있다.

자공은 말솜씨가 뛰어난 제자였다. 그래서 '중니제자열전'에 기록된 자공은 외교가로서의 면모가 집중 부각되어 있다. 공자는 이런 자공의 언변이 마땅치 않았던지 "늘 그 부분을 억누르곤 했다"고 한다. 아무튼 자공은 기원전 5세기 초 제나라의 전상(田常)이 제나라 명문 대족들을 동원하여 노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자청하여 여러 나라를 돌며 화려한 언변으로 설득하여 제나라의 공격을 단념시켰다.(당시 자공은 제나라를 시작으로 오吳 → 월越 → 진晉 → 노魯에 이르는 관련 5개국을 단기간에 방문하여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

'사기' 기록만 놓고 보더라도 자공은 마치 전국시대를 풍미했던 국제 외교 전문 로비스트들인 유세가(遊說家)들을 연상시킬 정도로 현란한 말솜씨와 화려한 행보를 선보이고 있다. 말하자면 전국시대 유세가들의 원조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다. 자공의 5개국 순방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사마천의 다음과 같은 평가만으로 충분할 것 같다.

자공이 한 번 나서서 노나라를 존속시키고 제나라를 혼란에 빠뜨렸으며, 오나라가 망하고 진나라가 강국이 되었으며, 월나라는 패자가 되었다. 요컨대 자공이 한바탕 뛰어다닌 결과 국제 정세에 균열이 생겨 10년 사이에 다섯 나라 모두에 큰 변동이 생겼다.

당시 자공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그가 월나라를 방문하자 월왕 구천이 직접 나서 자공이 지나게 될 길을 청소하게 하고 몸소 마중을 나와 직접 수레를 몰아 자공을 숙소로 안내했다는 대목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당대의 유가 사상가였던 공자의 제자라는 명성만으로는 이런 대접은 결코 받을 수 없었다. 더욱이 월나라는 유가나 유가 사상과는 거리가 먼 나라였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각국이 자공을 이렇게 환대했을까? 또 그가 어느 정도의 위세를 가졌기에 국제 정세에 균열까지 초래했단 말인가? 이는 스승인 공자도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할 대단한 활약이었다.

공자와 그 제자들을 묘사한 벽돌그림
공자와 그 제자들을 묘사한 벽돌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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