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언어, 먼저 주어라

세상에서 공평한 게 딱 하나 있다. 시간이다. 부자와 빈자, 권력자와 서민, 행복한자와 불행한자, 건강한자와 병자든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시간은 평등하다.

권력자라 해서 시간이 무한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부자라 해서 시간을 한없이 늘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사는 사람 모두에게 흘러가는 시간은 똑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면 미심스러운 데가 있다. 재산 능력 외모 등 다른 것은 다 불공평하면서 시간만 공평할 수 있을까. 아니 공평하게 배분됐다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함정은 없는 것일까.


이런 의문은 타당하다. 결론적으로 시간 역시 불공평하다. 단 전제조건이 있다.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삶의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진다는 것이다. 승자의 시간과 패자의 시간은 다르다. 조금 더 조건을 붙인다면 행복한 승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시간은 판이하게 다르다. 시간의 불공평함에 대한 힌트는 영화 <사랑의 블랙홀>에 나와 있다. 해롤드 래미스 감독이 1993년에 제작된 영화다.

자기중심적인 TV기상통보관 필 코너스는 2월2일 성촉절 취재차 펜실베이니아 펑추니아 마을로 가게 된다. 목적지에 도착한 필은 서둘러 방송을 마쳤지만 폭설로 길이 막혀 돌아가지 못한다.

다음날 아침, 호텔에서 눈을 뜬 필은 어제와 똑같은 라디오 멘트를 듣게 되고 분명히 전날 성촉절 취재를 마쳤건만 축제준비로 부산한 마을의 모습을 보고 경악한다. 그 이튿날도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진다. 시간이 2월2일에서 맴도는 것이다.


필은 매일 반복되는 시간을 이용하여 여자를 당일에 유혹해서 침대로 끌어들이기 은행현금 운송차량에서 돈 가방 훔치기, 축제장 난장판 만들기 등 온갖 못된 짓을 해가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여기서 현실적이면서도 궁극적인 질문이 등장한다. 악동기질이 농후한 필은 그렇다 치고 우리가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행동할까. 간단히 말해서 시간이 반복된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 이 문제의 해결은 역시 시간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된다.

선형적 시간이냐 순환적 시간이냐의 문제다.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것은 선형적 시간관념이고, 역사상의 사건은 주기적으로 일어나고 그 반복이 시간 자체의 본질이라고 믿는 것은 순환적 시간관념이다.

근대 철학자 니체마저도 피타고라스학파, 스토아학파, 신플라톤학파인 고대 그리스인 철학자처럼 사건이 결국은 반복된다고 믿었다. 순환적 시간관념은 인류역사에서 그만큼 뿌리가 깊다. 문제는 순환적 시간관념의 부(負)적인 면이다. 어차피 반복되는 세상, 시간이라면 굳이 새롭게 살 이유는 없다. 삶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필이 축제장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이해할만하다.

그러나 그런 이해는 이해로서 끝나야 한다. 실재가 아닌 이해는 오래갈 수 없다. 순환적 시간에 파묻힌 필은 염증을 느껴 자살을 여러 차례 시도한다.

2월2일 밤, 자살에 성공하지만 역시 2월2일 아침에 라디오 방송과 함께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죽음조차 시간의 반복 속에 파묻히는 것이다. 반복되는 시간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우울증에 걸린 필, 그러던 어느 날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시간속의 삶이라면 한번 달리 살아볼 일이라는 생각이 퍼뜩 든다.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극적인 변신이 이뤄진다. 이제와는 달리 정반대의 방식대로 살아간다. 평소에 배우고 싶었던 피아노를 배우고 남을 위해 연주를 한다. 애써 배운 얼음 조각으로 남을 즐겁게 한다. 위급한 사람들 구하기 등 많은 선행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래봐야 2월2일이다. 그러나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2월2일이다.

이전의 하루가 자기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이제는 타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개인적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이다. 자기에서 타인으로의 이동거리는 멀고도 먼 길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평생 도달하지 못하는 거리다. 아니 그 길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살다 가는 사람이 널린 게 세상이다. 그러나 필은 이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었다. 그 먼 거리를 돌파하게 한 원동력은 무엇보다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다.

그리스어에는 시간을 뜻하는 단어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있다. 크로노스는 측정할 수 있는 시간 단위다.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파악한 대로 무한히 흘러가는 시간이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과거 현재 미래가 현재에서 만나는 시간이다. 고대 기독교회의 최고사상가로 꼽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과거는 상기(想起)의 힘을 통해 현재에 모습을 드러내고 미래는 기대로서 현재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카이로스 상황에서는 시간을 결코 흘러 보내는 법이 없다.

필 또한 하루하루를 그냥 흘러 보내지 않았다. 삶의 궁극적인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이전의 크로노스, 순환적 시간 속에서 잃어버린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찾은 것이다. 카이로스 시간 속으로 차원이동한 필은 행복한 승자가 변신했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말한 현존재와 다름 아니다. 하이데거는 과거 미래 현재의 시간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재를 파악한 20세기 사상가이다.

카이로스 시간 속에서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어리석다. 권력과 금력을 갖춘 사람이 자기중심적이라면 더욱더 어리석다. 모든 시간은 연관돼 있다는 점에서 어느 때고 의미 있고 가치 있다는 점을 놓치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적이 된다면 주변에도 그렇게 비친다.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인 사람과는 진정한 관계를 맺기 싫어한다. 본인에게 재앙의 씨앗이 싹트는 것이다. 그들은 물리적인 승자일지는 모르지만 내면적으로 결코 행복하지는 않다.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는 삶은 행복한 승자가 아니다.

그들의 삶은 사해(死海)속을 헤매는 것 같다. 물이 빠져나가는 곳이 없는 사해는 염분이 높아 물고기 등 생물체가 살지 못하는 호수다.

반면 진실로 행복한 승자는 자신 못지않게 타인에게 초점을 맞춘다. 남에게 베푸는 타자본위의 삶이다. 이들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선이라는 생각을 실천하는 부류들이다.

타자본위의 삶에서 한가지 중요한 원칙이 있다. 베푸는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때 이뤄졌느냐 하는 점이다.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할 때 행해져야 한다. 베푸는 것은 크고 작음에 있지 않다. 적절한 때 행해져야 한다. 크지만 시기가 맞지 않으면 행하지 않음만 못하다.

자기본위의 사람들도 베풀 줄 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필요할 때 베푼다. 자신들의 명성 자존심 등 오직 자기들만의 이유로 남에게 베푸는 척하는 것이다. 위장된 선행일 뿐이다.

타자 본위와 자기본위의 삶의 차이는 합리와 옮음의 차이일 것이다. 타자본위의 사람들은 합리적인 이유로 베풀지 않는다. 불합리하더라도 그렇게 한다. 그게 옳기 때문이다.

세상이치가 묘한 것은 남에게 베풀수록 돌아오는 것도 많다. 베푸는 것은 신비로운 연금술을 통해 부의 창출에 힘을 불어넣는다. 먼저 줄수록 나중에 돌아오는 것이 더욱 많다. 먼저 주고 나중에 받는 법칙은 어디에서나 통한다. 탁월한 경제적 효과를 누리는데도 이 법칙은 절묘하게 작용한다. 비즈니스세계를 돌아보자.

‘던힐’ 담배 브랜드로 유명한 BAT가 처음 중국시장을 공략하는 과정은 의미 있는 이야깃거리다. BAT는 먼저 중국 사람들에게 자사제품을 무료로 나눠줬다. 또 사람을 고용해서 담배 피우는 시범을 널리 알렸다. 당시로서는 먼저 주고 나중에 받는 파격적인 전략을 구사했다. 장욕취지필선여지(將欲取之必先與之), 즉 ‘장차 취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 한다’는 중국의 현자 한비자의 말을 서양기업이 중국에 적용, 성공으로 이끈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피렌체의 메디치가문이 상류층에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방법을 구사했다. 15세기 메디치가문의 로렌츠는 금융업을 통해서 번 돈으로 엄청난 권력을 얻었다. 금력으로 권력을 산 것이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돌리고자 그가 첫번째 한 일은 무조건 베푸는 것이었다. 사상 최고의 예술 후원자가 되었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을 후원한 것만으로도 가문의 위상은 드높아졌다. 메디치가문이 최상류층에 진입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행복한 승자로 거듭났다.

남을 돕고 즐겁게 하는 필의 행동은 역시 먼저 주는 전략이다. 사람이 친절해질 때 운이 좋아지는 법. 필은 방송 종사자 리타의 사랑을 얻게 되고, 2월2일의 마법에서 풀리는 마법의 순간을 갖게 되는 행운도 누리게 된다. 기대하지 않은 행운이다.

‘오늘은 내일이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필이 외쳤다. 어제와 같은 오늘에서 드디어 탈출한 것이다. 매번 반복되던 2월2일이 2월3일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났다.

필이 사건이 반복된다는 순환적 시간 개념을 가졌다면 그리고 시간은 전후 맥락 없이 흘러가는 크로노스 시간 속에 살았다면 결코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영화는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가 입체적으로 부각되는 카이로스 시간 속에서만 그런 기적은 발생하는 것이다.

카이로스 시간 속에서는 타자본위의 삶을 지향한다. 타자본위의 삶은 고정된 운명을 바꾸는 쇠망치이다. 쇠망치의 해법은 베푸는 것이다. 베풀되 먼저 주는 것이다. 나중에 주는 것이 아니다.

물론 먼저 주는 데는 나중을 기대하는 것도 있고 기대하지 않는 것도 있다. 필처럼 나중을 기대하지 않는 순수성도 있고, BAT나 메디치가문처럼 나중을 고려한 전략일 수도 있다. 그 의도야 어떠하든 먼저 주는 것은 승자의 언어이고, 나중에 주는 것은 패자의 언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