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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와 언론자유[오동희의 思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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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27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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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남으로부터 사관(史官)의 기록하는 것이 왕의 말 출납만을 쓸뿐이었는데, 반정 뒤로는 사람들이 불붙은 기름 속에서 살아나자 놀고 즐기는 데만 빠져 직무를 돌보지 않고 왕의 말마저도 기록하지 않다가, 여러 해를 지나고 나서야 사고(史稿)를 정리하니, 조정의 논의나 상벌 등의 일에 빠진 것이 많았다."

중종 2년(1507년) 6월 2일 중종실록 3권에 기록된 '무오사화 이후 사관이 기록을 소홀히 하게 된 것'에 대한 사신의 논평이다.

무오사화는 연산군 4년(1498년) 이극돈·유자광 등 훈구파들이 사림출신의 사관 김일손이 사초(실록의 토대가 되는 기초 기록)한 성종실록에 그의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항우에 죽임을 당한 초나라 회왕-의제를 추도하는 글)을 싣은 것을 두고 벌어진 조선 최초의 사화(士禍)다. 왕조차도 보는 것이 금지된 실록의 사초를 연산군이 보고 이 역사적 기록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해 사화(史禍)고 부른다.

훈구세력들은 조의제문이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연산군의 증조부)를 비방한 글이라고 주장하면서 수많은 사림을 죽이고, 김종직의 무덤을 파서 부관참시하는 등 피바람이 분 조선 최초의 사화였다.

이 무오사화 때(1498년)부터는 사관이 화를 두려워해 단순히 왕의 말만 기록했고 더 이상의 활동은 하지 않았고, 중종반정(1506년) 이후부터는 기록마저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조선시대 사관은 지금으로치면 기자와 같은 직업군의 공무원이다. 그래서 조선초기에는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기록하기 위해 왕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가장 갈등을 많이 드러냈던 왕이 태종 이방원이다.

그는 여러차례 사관이 편전에 들어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것이 못마땅해 편전에 들지 못하도록 했으나, 당시 사관 민인생은 이를 듣지 않고 장막을 걷어 들여다보기도 하고 변장을 해 왕의 사냥터에 따라 다니며 기록하다가 유배를 가기도 했다.

사냥을 좋아했던 태종이 하루는 노루 사냥 중 말에서 활을 쏘다가 떨어지자 주위를 둘러보며 "낙마를 사관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린 사실이 사관에 의해 태종실록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을 정도다.

이번에 개정이 추진되는 언론중재법에 대해 정부 여당은 권력자에 대한 비판은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돼 있고, 일반 시민들이 가짜뉴스로부터의 받는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징벌적 손해배상 조항을 넣었다고 주장한다. 그 뜻과 취지에는 100% 공감한다.

하지만 제도가 추구하려는 이상은 항상 현실에서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 쉽다. 가짜뉴스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언로를 막는 방법 외에 다른 길을 먼저 찾아봐야 한다. 또한 그 방법과 기준은 구체적이고 혼란이 없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언론이 향하는 곳은 대체적으로 일반 시민이 아니라 권력이기 때문이다.

태종은 사관을 편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서 "사필(史筆)은 곧게 써야 한다. 비록 대궐 밖에 있더라도 어찌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라고 했고, 민인생은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라며 되받아쳤다. 하늘의 뜻을 받아 기록하는 것이니 장소를 제약하지 말라는 뜻이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총회를 끝낸 후 귀국길에서 "언론이나 시민단체, 국제사회에서 이런저런 문제 제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점들이 충분히 검토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 만큼 국회에서도 신중한 논의가 이뤄지길 바란다. 역사는 한번 기록되면 고쳐쓰기 힘들다. 법도 마찬가지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부국장)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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