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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겨울은 하루씩만 견디는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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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수 시인
  • 2019.11.3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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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조현정 시인 ‘별다방 미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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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발견’으로 등단한 조현정(1971~ ) 시인의 첫 시집 ‘별다방 미쓰리’는 병들어 근심하고(患), 미혹되거나 변하고(幻), 기쁘고 즐거운(歡) 삶의 풍파를 담담하게 풀어놓고 있다. 몸에 찾아온 병은 “언제고 찾아올 빙하기”(이하 ‘시인의 말’)였고, “죽음의 대기실”(‘앙티상브르 -상담 1’)까지 갔다 오자 이제 더 이상 “바라는 것 없이 사랑”(이하 ‘위험한 시작’)할 수도, 우울과 불안의 열차에서 “뛰어내릴 용기”도 생겼다.

태어나 처음 언제 웃었는지 기억하고 싶어요
풀 먹인 광목이 부드러움을 가장하고 네모나게 펄럭여요
차가운 아랫목에 몸을 누이면
별 없는 밤하늘에 푹푹 빠지는 꿈을 꿔요

깊은 허방인 줄 모르고 첫 발을 내딛던 순간
환(患)과 환(幻)의 표정으로 하늘에 떠 있던 당신을 기억해요
어그러진 선율에 잠시 귀 기울이면
아직도 속삭이듯 말 건네는 당신

우리 오늘밤
눈 쌓인 논둑 위로 내리는 달빛 한 사발씩 나눠마셔요
사춘기 소녀처럼 유행가를 불러줄게요

아,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해주세요
모든 화면은 잘 포장된 거울
사는 게 쉽냐고요?
나는 아―쉽다고 말하겠어요
언제나 움츠린 얼굴로 하는 농담은 슬퍼요

몸이 부서져도 놓지 않을 거라고
거울 깊은 곳으로부터 어머니의 기척이 들려오네요

처음보다 좋아지고 있어요

- ‘患, 幻, 歡’ 전문


‘국립공주병원 〈세상 끝의 집〉을 보다’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시는 이번 시집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KBS1 〈세상 끝의 집〉 3부작은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들! 그들의 집, 국립공주병원을 배경으로 우리와 0.01% 다른 어떤 이웃과 가족의 이야기, 그리고 의료진들의 휴먼스토리!”라는 기획의도에 맞춰 2015년 7월 방영됐다. 이 시는 방영 당시가 아닌 아픈 후 시청하고 쓴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집 밖으로, 세상 밖으로 나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사는 국립공주병원이 배경이다. 특히 12세에 성장이 멈춰 유행가를 부르는 한 조현병(調絃病) 환자에게 눈길을 준다. 망상, 환각, 언어의 혼란, 정서 둔감과 같은 증상이 나타나는 조현병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자신만의 성을 쌓는다. 그곳에서 엉클어진 뇌신경의 현(絃)을 조율한다.

“태어나 처음 언제 웃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뇌가 멈춰버린 순간이다. 몸이 아파 “차가운 아랫목에 몸”을 누이는 것은 환(患)이고, “별 없는 밤하늘에 푹푹 빠지는 꿈”을 꾸는 것은 환(幻)이다. 이런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당신의 표정은 “환(患)과 환(幻)”이다. 이 시는 프로그램의 장면과 아픈 시인의 심정이 수시로 교차하고 투영된다.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해”달라고 하지만 실상은 병색 완연한 내 얼굴을 내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는 게 쉽냐고요?” 심각한 물음에 “나는 아―쉽다고 말”한다. 농담(아, 쉽다) 속에 진담(아쉽다)을 집어넣었다. “몸이 부서져도 놓지 않”는 이유는 힘들어도 힘든 표정을 안 짓고, 슬퍼도 슬픔 내색을 안 하고, 심각한 상황에서도 농담 한마디를 던질 줄 아는 당신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거울 깊은 곳”에서 “어머니의 기척이 들려오”지만 아직은 “속삭이듯 말 건네는 당신”을 위해 환(患)을 이겨내야 한다. “처음보다 좋아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 환(歡)이다.

다시 필까
꽃이 피면 좋겠어
다시 꼭

과수원에 든 겨울 속을 서성이던
나도 겨울이었지

겨울 과수원에서 돌아앉은
바람 울타리쯤 사는
늙은 느티나무에게
새 점괘를 들으러 가는 길

조금만 걸어도 금세 죽을 것 같았어

하늘 끝까지 숨이 닿는데
서둘러 바람을 풀어
그가 전갈을 보냈더군

서둘지 말거라
겨울은 하루씩만 견디는 거란다
봄은 늘 거기 있었단다
우리가 가는 거란다 아이야

꽃은
언제나 다시 피면 좋겠어

- ‘지나간 겨울 이야기’ 전문


등단한 지 반년도 안 돼 첫 시집을 낸 시인은 등단이라는 절차를 늦게 거쳤을 뿐 오래 시를 써왔다. 시문·A4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시인은 강원민예총 문학협회장 및 춘천지부 문학협회장을 역임했다. 시인은 춘천에서 ‘준수네 과수원’을 운영하고 있다. “나는 당신의 과수원에서 가장 못생긴 과수나무”(‘지나간 봄 이야기’)라는 아픈 자책이나 “꽃은/ 언제나 다시 피면 좋겠”(‘지나간 겨울 이야기’)다는 봄(희망)을 기다리는 시가 여기서 쓰였다.

시 ‘지나간 겨울 이야기’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으로 시작한다. 겨울 과수원을 거닐던 시인의 눈에 과수나무가 들어온다. 꽁꽁 얼어 죽은 것 같은 나무, 내 몸도 ‘겨울’과 다르지 않다. 과수원 옆 늙은 느티나무 곁으로 걸어가는데도 숨이 턱턱 막힌다. 잠시 서서 숨을 고르는데 신의 음성인지, 돌아가신 엄마 목소리인지 들려온다. “서둘지 말거라/ 겨울은 하루씩만 견디는 거란다”. 봄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봄을 찾아가는 것이라는….

엠사이즈 상복의 가난한 딸들 가락 맞춰 마른 곡소리 흉내 내다 조문객 발가락 양말에 참았던 웃음보 구멍 난 빨강 양말에 덜컥 터져 버렸다 빈소 한 구석에 쭈그려 앉아 깡소주 들이키던 막내아들 저것들이 미쳤나 소주병 집어던지고 끽끽 웃던 딸들 목구멍에서 이십칠 톤 트레일러가 요란하게 달려 나온다 그 안에 아비가 졸고 있다 짙게 패이는 스키드마크 소리에 늘어지게 단잠 자던 어미 깨어나 검지 손가락 까딱까딱 막내아들 부른다 포커 한판 붙자는 말씀이시다 한판은 무슨 딸꾹 두판 세판 딸딸꾹 조의금 판돈 바닥날 때까지 판판이 어미 사전에 die란 없다 사방팔방 발길질 날렸을 아비 다리 부러져 콜! 영정 부수고 관짝 구멍 냈을 무쇠주먹 아비 팔 으스러져 콜! 처연히 이쪽 들여다보고 있는 아비 얼굴 사각 창에 갇혀 콜!

- ‘어떤 평형’ 전문


아버지의 상(喪)을 치르는데, 막내아들은 “빈소 한 구석에 쭈그려 앉아 깡소주 들이”키고 “엠사이즈 상복의 가난한 딸들”이 조문객을 맞고 있다. 통념상 바뀐 풍경이다. 죽은 아버지에 대한 예의가 딸들은 형식적인데 아들은 심각(어쩌면 더 형식적)하다. 급기야 “발가락 양말에 참았던 웃음보”가 조문객의 “구멍 난 빨강 양말”에 터져버린다. 이를 본 막내아들은 “저것들이 미쳤나” 하며 소주병을 집어던진다. 안하무인이다. 이를 중재하는 건 남편이 죽었는데도 “단잠은 자던” 엄마다. “포커 한 판”에 그동안의 궁금증이 다 풀린다. 엄마가 “die란 없다”며 “콜”을 부르는 순간 살아 있는 엄마와 죽음 아버지, 딸(들)과 막내아들 사이가 평형을 이룬다.

시 ‘별리(別離)’에서 보듯, 엄마도 곁을 떠났다. 아버지의 죽음과 달리 엄마의 부재는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 마당에 핀 붉은 모란 같은 엄마, 시인의 마음에 핀 꽃. 엄마의 계절은 저물었어도 “저절로 붉어져” 엄마의 꿈을 꾼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슬플 때마다 “이불을 덮어주며 포옥 감싸주는 당신”(‘위로’), 詩름時름 함께 살아가는 농부 남편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겨울을 견디면 늘 거기 있던 봄이 찾아올 것이다.

◇별다방 미쓰리=조현정/북인/132쪽/9000원.



[시인의 집]겨울은 하루씩만 견디는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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