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선의 컬처 톡톡]여신의 빛, 사람의 빛

3일간 제주 여행을 다녀왔다. 제주 관광공사가 후원하고 제주생태관광이 주최한 팸 투어 프로그램이다. 제주는 꽤 다녀 본지라 특별한 게 뭐 있을까 싶었지만 여행의 주제 ‘영화로운 여신의 빛’은 좀 궁금했다. ‘여신의 빛?’

일단 크레타 섬에서 발원한 그리스 여신들, 중국 서왕모나 뱀 모습인 여와, 네팔의 힌두 신 같은 절세미녀나 신이한 힘의 여신들은 잊자. 제주의 여신은 사람의 신이고 할머니 신이니까. 비틀즈의 ‘루시 인 더 스카이 위드 다이아몬즈(Lucy in the Sky with Diamonds)’ 노래에서 이름을 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인류의 할머니 루시가 오히려 가깝다.


먼저 제주를 10년을 다니고도 처음 먹어봤던 ‘참기름 -꿀-계란 할머니 스크램블’부터 할머니 얘기다. 남자들은 몽고군에 죽고 왜구에 죽고 4.3에 죽고 바다에 죽어 가난했고 손이 귀했던 시절 할머니는 손자에게 섬에서 구하기 어려웠던 참기름, 계란, 꿀을 섞어서 먹였다.(시인 박은희의 ‘할머니의 바다’ 중 “가만히 귀 기울이면/테왁을 지고 바다로 나간/할머니의 삐거덕거리는 관절음이/ 파도소리에 섞여 살아나고”를 느껴보라.)

섬의 제일 큰 여신 설문대할망이 오름을 만들고 한라산을 만들고 오백 자식을 두어 제주도를 살렸듯 수만 손자들을 살려 낸 할머니는 손자들에게는 설문대할망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이기적 유전자는 제주에서 할머니고 그 할머니가 여신이고 그 마음이 여신의 빛이다. 변산의 계양할미나 진도 영등할미, 대만의 천상성모 마쭈(馬祖)할미 등에서도 할머니 바다신의 모습이 나타나지만 제주의 여신은 생계형이란 특징도 강하다.

여신과 남신의 전설이 모셔진 와흘 본향당. 400년이 넘는 팽나무가 설문대할망처럼 굽어보고 있다./ 사진제공=황인선

육지 무당들도 꽤 찾는 와흘 본향당. “산에서 온 남신과 혼인한 여신이 아기를 가졌대요. 여신은 몹시 돼지고기를 먹고 싶어서 돼지가 지나간 발자국에 고인 물을 먹고 그것을 안 남신은 더럽다하여 떠났다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여신을 이 향당에 모시고 후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해요.”


제주생태관광 윤순희 대표는 또 가녀린 다른 여신도 보여줬다. 조개를 채취하러 갔다가 왜구의 배가 쳐 들오는 것을 보고 달음질쳐 마을 입구까지 와서는 기진해 죽었다는 박씨 처녀 여신. 그래서 제주의 신들은 1만하고도 8000. 여행자인 우리는 신들의 섬 제주를 보지 못했지만 매년 봄, 집 수호신들이 자리를 옮긴다는 신(神)구간에 제주 사람들은 대거 이사를 한다. 그들은 여전히 신과 살고 있다.

나는 3일간 신들의 섬 여행을 하면서 적정기술이란 신화스럽지 않은 말이 불쑥 떠올랐다. 첨단이나 혁신이 아닌, 사람에게 필요한 기술이 적정 기술이라면 제주 신화, 제주의 방식은 많은 것이 사람을 적정하게 향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제주 마스코트가 돌하르방인데 영조 때 김몽규 목사가 피폐한 제주에 힘을 넣고자 진시황 때 흉노족을 공포에 떨게 했던 헤라클래스 급 장사 완옹중을 본 따 현에 세웠던 관 주도의 석신(石神)이 시초다. 그래서 돌하르방은 관모를 쓰고 도포를 입은 무서운 형상이다. 그런데 이러면 적정하지 않다. 제주 출신 화가 김남흥은 돌하르방을 아이들의 친구 하르방으로 공원을 꾸몄다. 편안하고 재밌고 할머니의 빛이 감돈다. 적정 예술 아닌가?

교래 곶자왈 숲 산책 중 가수 강허달림이 야외교실에서 공연. 여행자 20여명이 많은 걸 내려 놓고 듣고 있다./ 사진제공=황인선

우리는 교래 곶자왈 숲을 거닐다 ‘기다림-설레임’의 가수 강허달림의 공연도 보고, 백약이 오름에 올라 2km 소똥 길도 맨발로 걷고, 영화 '지슬'의 오멸 감독이 만든 '어이그 저 귓것(화상, 바보의 제주 토속어)'도 밤 정원에서 이불 쓰고 보고, 귤 밭에 귤도 따고 하도 해변 길을 시간을 잊은 채 걷고 제주 토속 음식 요리사 양용진의 희귀한 콩닥콩닥과 구쟁기적과 깅이 콩볶음도 음미하고, 뿔 소라도 잡았고 5일장도 갔었다.

문화기획자, 간호사, 병원 홍보팀장, 사회복지사, 콜 센터 팀장, 다큐 작가, 블로거 등 여행자 20여 명은 무엇을 느꼈을까? 누군가 “토속 음식, 말 공원, 숲, 바다, 오름, 귓것 영화, 뿔소라, 돌하르방의 하르방 예술가 김남흥과 동자석…. 그 속에서 우리는 사람을 만났던 것 같습니다. 이번 여행은 결국 사람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어요”라고 했던 이것이었을까?

공항. 여행자들은 서로를 안아주면서 헤어졌다. 객관의 자리에 서려 했던 나는 그 마음들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그들은 떠나기 싫어했다는 것을. 그러나 결국 떠나는 그들을 보면서 물어 봤다. ‘이것이 여신의 빛이었을까? 혹은 여신이 비춰 준 사람의 빛? 그래서 아주 적정한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