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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제없는 권력의 비극…누가 스무살 임금을 죽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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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경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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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21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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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58 - 예종 : 견제 없는 권력은 화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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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9년 11월 28일 아침 예종이 경복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갓 스무 살의 청년군주가 재위 14개월 만에 포부를 펼치지도 못하고 운명한 것이다. 이 죽음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사극이 예종을 주목하는 건 바로 그 물음표 때문이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임금님의 사건수첩’은 예종과 임금을 죽이려는 세력의 암투를 흥미롭게 그려냈다. 그런데 역사적인 엔딩은 영화처럼 해피하지 않았다. 실존인물 예종은 요절을 피하지 못했다. 실록에서는 그 달에 족질(발병)을 앓았고 죽기 며칠 전부터 몸이 편찮았다고 했지만 병사라고 보기에는 갑작스럽고 황망하다.

의문의 단서는 시신을 목욕시킬 때 나타났다. 죽은 지 이틀 밖에 안 됐는데 변색(變色)이 일어난 것이다. 독살의 증거라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훈구대신들은 병환이 오래돼서 그런 거라고 둘러댔다. 오히려 임금의 병을 감춘 의원과 내시를 처벌해야 한다며 진상을 호도했다.

훈구대신들의 의심스러운 행적은 후계자 선정과정에서도 드러났다. 신숙주는 예종이 죽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비 정희왕후(세조비)에게 다음 국왕을 결정하라고 촉구했다. 원자, 즉 예종의 아들이 아직 네 살에 불과하므로 대안을 세워야 한다고 압박한 것이다. 부마 정현조가 양측을 서너 차례 오간 끝에 전교가 내려졌다.

“원자가 너무 어리고, 월산군(예종 형 의경세자의 맏아들)도 병약하다. 자을산군은 어리지만 세조께서 그 도량을 칭찬하셨으니 큰일을 맡을 만하다.”(예종실록)

자을산군은 1457년에 죽은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왕위계승 서열 3위에 불과했다. 구차한 변명이 붙었지만 이 13살 소년이 원자와 친형을 제친 것은 사실 훈구대신들의 두목 격인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전교가 나온 그 시각 이미 경복궁에 들어와 있던 자을산군은 당일 오후 전격적으로 즉위했다. 마치 사전에 각본을 짜놓은 것처럼 일사천리였다.

만약 예종이 독살당한 것이라면 누구의 소행일까? 지금까지 언급한 훈구대신들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훈구(勳舊)’란 대대로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와 그 가문을 뜻한다. 여기서는 예종의 아버지 세조가 조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를 빼앗는 데 기여한 공신들이다. 정통성 없는 세조는 한명회, 신숙주, 홍윤성, 정인지 등 훈구대신들에게 의존하며 통치했다.

세조 이래 조선은 공신의 나라였다. 정난공신(계유정난을 도운 공신)과 좌익공신(왕위찬탈에 앞장선 공신)들은 무소불위의 특권을 누리며 국정을 농단했다. 대표적인 것이 분경이었다. 분경은 대신의 집을 외부인이 사사롭게 방문하는 행위다. 뇌물과 인사청탁의 우려가 있어 태종이 금했는데 세조가 공신들에게 허락한 것이다. 그러나 예종은 아버지와 달랐다.

“사헌부 서리와 하인들이 정인지의 집에서 분경을 감시하다가 알현하려는 자를 붙잡았는데 오히려 정인지의 종들에게 곤욕을 치렀다.”(예종실록)

예종이 죽기 직전인 1469년 11월 초에 벌어진 일이다. 혈기 넘치는 임금은 국정농단의 온상인 분경을 다시 엄금했다. 공신들은 반발했다. 도리어 왕명을 받고 온 관리들을 폭행하기도 했다. 게다가 중앙조정과 지방관아는 물론 궁궐까지 그들의 끄나풀이 득실거렸다. 왕 하나 어찌 하는 건 일도 아니었으리라.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데는 예종 자신의 실수도 작용했다. 특정세력의 힘이 비대해지면 견제세력을 키워 균형을 맞추는 게 통치술의 기본이다. 그런데 이 미숙한 왕은 즉위 초기에 아버지가 심어놓은 견제세력을 제 손으로 뿌리 뽑고 말았다.

“누가 원래의 공신인가? 한명회로다. 누가 구공신인가? 한명회로다. 누가 큰 공신인가? 구성군이로다. 누가 신공신인가? 구성군이로다.”(세조실록)

1468년 5월 세조가 연회석상에서 기생들에게 시킨 노래다. 그는 말년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적개공신을 중용하려고 했다. 적개공신은 정난공신, 좌익공신과 달리 왕실과 무장 세력이었다. 특히 임영대군(세종 4남)의 아들 구성군과 정선공주(태종 4녀)의 손자 남이가 두각을 나타냈다. 이들 신공신이라면 세자를 보필해 구공신들을 견제할 것이라고 봤다.

얼마 후 세조는 이 28살 동갑내기들에게 벼락출세의 길을 열어줬다. 구성군은 영의정, 남이는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지금의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새파란 20대에게 맡긴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신진세력을 육성할 시간이 모자랐다. 그해 9월 세조는 예종에게 왕위를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새 임금은 즉위한 날 남이를 겸사복장으로 좌천시켰다.

남이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했고, 여진족 추장 이만주를 제거하는 정벌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후방에서 어영부영한 구성군이 자기보다 더 세조의 총애를 받자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 탁월한 용맹과 거침없는 성품이 불안했을까.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예종은 그를 꺼렸다고 한다. 표적 좌천의 배경이다. 남이는 가만있지 않았다.

“왕이 분경하는 자를 엄하게 살피니 재상들이 반드시 싫어할 것이다. 아마도 간신이 난을 일으키면 우리는 개죽음을 면하지 못할 터. 하여 내가 먼저 거사하고자 한다.”(예종실록)

1468년 10월에 벌어진 남이 역모사건은 유자광이 씌운 억울한 누명이 아니었다. 남이는 한명회 등 훈구대신들이 난을 일으키리라 보고 선수를 치려다가 사지가 찢겨 죽었다. 신공신이자 백전노장이었던 강순도 이 사건에 연루돼 목숨을 잃었다. 분경금지령에 맞서 임금과 힘겨루기를 해온 구공신들로선 손도 안 대고 코를 푼 셈이다.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고 했다. 신공신들이 무너지며 고립무원에 빠진 청년군주도 오래 살지 못했다. 올바른 견제세력이 없으면 주권자라도 무사할 수 없다.
권경률 역사저술가
권경률 역사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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